김가람 법무법인 린 변호사(35)는 축구선수 출신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 때까지. 하지만 축구만 하지 않았다. 축구로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공부를 병행했고 그 결과 지금은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이었다. 전국대회를 나갔는데 2패로 예선에서 탈락했다. 우린 힘도 못쓰고 속칭 ‘반코트경기(상대가 강해 하프라인도 제대로 넘지 못하는 경기)’로 졌다. 그 때 알았다. 축구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같은 또래에서 제일 잘 나가도 월드컵에 나갈까 말까인데 과연 이런 실력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란 의구심이 들었다.”
김 변호사의 아버지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창출한 안정환과 박지성을 키운 김희태 FC 의정부 감독 겸 김희태포천축구센터 이사장(66).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즐겼고 초등학교 3학년 말부터 엘리트선수의 길로 접어든 그는 아버지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그럼 축구하면서 공부를 병행해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가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당시 서울체고 축구선수 출신으로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진학해 공부를 한 이용수 세종대 교수님을 롤 모델로 공부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 길을 갔다. 당시 축구선수 출신으로 서울대 체육교육과를 나와 스포츠심리학 박사과정을 다니던 윤영길 현 한국체대 교수님도 롤 모델이었다.”
김 변호사는 아주대와 프로축구 대우 로얄즈(현 부산 아이파크), 명지대 사령탑을 맡은 아버지를 따라 다니느라 서울 영희초교와 부산 연산초교를 오가며 축구를 했다. 축구와 공부를 병행하기로 결정한 뒤 처음엔 축구부가 없는 서울 가원중에 진학해 공부에 집중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다시 서울 수서중 창단팀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축구와 공부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합숙소에서 다른 선수들과 함께 생활했지만 훈련 외 시간과 저녁 시간엔 공부를 하러 다녔다. 축구와 공부를 병행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가원중으로 전학을 갔다. 중학교 3학년이 됐는데도 고등학교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수서중은 전패팀으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가원중으로 다시 옮겨 중동고에 입학해 공부했다.”
중동고에 입학해서는 공부에만 매진했다. 공부하면서 서울대 체육교육과 진학에 필요한 실기 시험도 준비할 계획이었다.
“중하위권이던 성적이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때 중상위권으로 올랐고 1학기 기말고사 때 상위권으로 올랐다. 당시 3학년들이 보는 모의 수학능력평가에 응시해 서울대 체육교육과 커트라인을 넘겼다. 2년 더 공부하면 충분히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 때 아버지께서 ‘2년 반 동안이라도 서울체고에서 다시 한번 선수생활 하면서 공부를 병행하는 게 어떻느냐’고 제안하셨다.”
고민이 됐다. 중동고에도 충분히 서울대에 갈 수 있는데 전학가도 될까?
“아버지께서 ‘서울체고에는 운동하다 공부로 방향을 튼 선수들을 돕는 선생님을 따로 둘 정도로 선수 출신 학생을 적극적으로 돕는다’고 했다. 축구를 하면서 공부하고 싶어 옮겼다. 서울체고 축구선수 출신으로 서울대를 졸업한 선배들도 많았다. 이용수 교수와 강신우 전 SBS 해설위원, 황보관 대한축구협회 전 기술위원장 등…. 그 이후에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김 변호사는 당시 축구, 배드민턴 선수 친구 2명과 함께 공부를 병행했다. 외형상 ‘엘리트선수’로 활약했지만 진학은 공부로 하려는 선수들이었다. 김 변호사와 친구 1명은 서울대에, 다른 친구는 연세대 스포츠계열에 합격했다.
이렇게 축구하며 공부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주대 감독 시절 우승도 많이 시켰다. ‘축구론 최고가 되어야한다’는 철학이 확고했다. 그런데 프로팀 대우 로열즈에 있다 명지대로 옮기면서 철학이 바뀌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명지대 감독으로 가면서 ‘성적은 신경 쓰지 않는 조건’을 달았다고 했다. 그 때 축구선수로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는 제 의견에 기다렸다는 듯 ‘그럼 공부를 병행하라’는 답이 나왔던 것이다.”
김 변호사는 초등학교 때까진 잘 했다. 서울지역 대회에서 3위를 했고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세계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들 말 한마디에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답변은 의외였다. 그것도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인데….
“프로시절 성적 스트레스가 많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명지대에선 축구하다 그만둔 선수들도 있었는데 공부하도록 돕기도 했다. 축구선수가 축구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축구 철학이 바뀔 때 제가 축구선수를 해 공부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서울대에 가서도 축구와 공부를 병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전 공부를 하러 갔는데 서울대에선 18년간 1승이 없었다며 축구에 집중해줄 것을 원했다. 하지만 1학년 때부터 심리학과 복수전공을 하면서 공부에 매진했다. 복수전공을 한 이유는 체육교육학과에만 있으면 축구부 활동에 매몰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윤영길 교수님처럼 스포츠심리학을 공부해 운동을 하다 그만두는 등 주목받지 못하는 선수들을 돕는 일을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카투사로 군입대했고 전역을 앞두고 대학원 준비 등 미래를 고민하면서 찾았던 정신과 의사의 조언이 그를 변호사의 길로 이끌었다.
“지금 프로축구 강원 FC에서 수비수로 활약하고 있는 오범석이 제 친구인데 제가 미래를 고민하자 선수들 상담해주는 정신과 의사선생님을 찾아가보라고 권유했다. 2시간 상담했더니 ‘상담사는 남의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일이다. 누구의 삶에 해답을 내주는 것은 아니다’라며 변호사를 권했다. 제가 생각하는 ‘선수와 학부모, 지도자의 어려움 해결엔 변호사가 제격’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러면서 미국 로스쿨을 권했다. 운동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스포츠가 생활화된 미국에서는 잘 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대를 졸업한 뒤 미국 로스쿨을 준비했고 2009년 세인트루이스 로스쿨에 합격해 9월 입학했다. 그런데 입학 한 달 만에 돌아왔다.
“2008년 금융위기가 왔다. 집안 형편도 그리 좋지 않았는데 환율이 두 배로 뛰어 올랐다. 3년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마침 한국에도 로스쿨 제도가 도입됐다. 그래서 한달 다니고 등록금 반환해 돌아왔다.”
김 변호사는 성균관대 로스쿨에 2011년 입학했다. 미국 로스쿨과 똑같은 시험이었다. 그는 3년을 잘 마친 뒤 변호사가 됐다.
“스포츠전문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성균관대 로스쿨을 준비하며 2010년 대한체육회 인턴으로 스포츠 행정도 공부했고 로스쿨에서도 스포츠 및 스포츠와 성격이 비슷한 엔터테인먼트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런데 2학년 말 국내 최고 로펌인 김&장에서 인턴할 때 ‘아 잘못 생각했구나’를 느꼈다. 당시 잘 나가는 변호사들께서 제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우쳐줬다. 스포츠전문 변호사라고 해서 스포츠만 공부해서는 안 된다. 의뢰인이 스포츠 관계자일 뿐 법은 ‘스포츠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맞았다. 스포츠법이 따로 없었다. 민법과 형법은 물론 산업법, 지식재산법 다 얽혀 있었다. 그래서 포괄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변호사가 된 뒤 다양한 경험을 위해 1년에 한번씩 로펌을 옮겨 다녔다. 로펌 별로 전문영역이 있었다. 여러 분야를 경험했다. 무형의 가치인 스포츠를 더 가치 있게 하기 위해 브랜드 전문 로펌에서도 일했다. 4개 로펌을 거친 뒤 처음 시작했던 법무법인 나라 출신들과 김&장 출신 변호사들이 함께 만든 법무법인 린에 둥지를 틀었다. 결국 처음 시작한 곳으로 돌아온 셈이다.
축구선수를 했던 게 법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됐을까.
“승부를 벌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 법에서도 공격 방법, 방어 방법이 있다.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상대를 공격하고 상대의 공격에 방어도 해야 한다. 제가 축구를 해 좋은 점은 의뢰인을 한 팀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한 팀이라는 생각을 하면 소송이 이겨야하는 ‘일’이라기보다는 함께 서로 이해하며 ‘공감하는 과정’이 된다. 소송에서 지더라도 한이 남으면 안 돼 해볼 만큼은 해봐야 한다. 축구에서 져도 최선을 다하면 후회를 하지 않듯…. 이렇게 하다보니 의뢰인들이 더 신뢰를 해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기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쁘다. 축구를 하며 체득한 끈기와 열정도 변호사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을까.
“지금은 열심히 일을 배우는 변호사일 뿐이다. 향후 조명 받는 선수들이 아닌 음지에 있는 선수와 학부모, 지도자들에게 힘이 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 조명 받는 선수 및 지도자는 도와줄 변호사들이 줄 서 있다. 고액 연봉 선수도 있지만 저액 연봉 선수도 있다. 그들도 법률 서비스가 필요하다. 아직은 컨설팅 정도 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그들을 대변하는 변호사로 활약하고 싶다.”
김 변호사는 운동선수 출신이나 운동선수가 되고 싶은 꿈은 있는데 공부를 해야만 하는 학생들에게 ‘인생학’ 강연도 한다. 운동선수 출신도 충분히 공부해 다른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고, 운동선수 꿈을 스포츠분야에서 다른 식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모두가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사회를 바란다.
“공부하는 학생과 운동하는 선수를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문제가 많다. 초등학교 때 프랑스로 축구 유학을 간 적이 있었다. 에펠탑 아래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아저씨들이 자기도 축구선수 했다며 같이 하자고 했다. 축구선수 출신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초등학교 때 축구클럽 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 때 생활체육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됐다. 그 때부터 어릴 때부터 모두 스포츠를 즐기다 선수로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언제든 다른 진로를 찾을 수 있는 시스템이 좋은 시스템이라는 것을 알았다.”
김 변호사는 축구도 계속하고 있다. 대학 시절 서울대 축구부는 물론 경영대 클럽 축구부에서도 활약했다. “복수 전공을 고민할 때 경영학에도 관심이 있어 경영대 축구부에 가입해 활동했다”고. 성균관대 로스쿨 땐 ‘로스쿨축구대회’에서 3연패를 주도했다. “제가 입학할 때까지 우승이 없었고 제가 졸업한 뒤에도 우승이 없다. 로스쿨 3년 동안 매번 우승시켰다”며 활짝 웃었다. 지역 클럽에서도 축구를 했다. 변호사로 바쁘게 사느라 최근 등한시 했지만 올해부터 주말 축구 동호회인 로얄 FC에 나가 공을 찬다. 로얄 FC는 2005년 한국축구의 전설 이회택 김재한 등 노장들을 주축으로 창단된 축구단. 매주말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공을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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