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 중에 어떤 아이는 ‘영어 못하면 대학 못 간다’는 부모의 말이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는 보란 듯이 영어를 하지 않고 대학을 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이에게 우스갯소리를 섞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줬다. “영어를 피해서 대학을 갈 수는 있어. 그런데 가서 또 영어를 해야 해. 대학교 1학년 교양필수과목에 영어가 있거든. 영어를 피해서 어찌어찌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을 하려면 영어시험을 또 봐야 해.” 여기까지 듣고 아이는 정말 욕이 나올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먹는 것이 중요한 만큼 대소변도 중요하잖아. 그런데 화장실 안 가고 계속 내버려둔다고 배 속에서 대소변이 절대 없어지지 않지. 계속 쌓이겠지. 쌓이다 어떻게 될까? 배가 아프겠지?” 아이는 아주 땅이 꺼질 듯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영어 공부를 하기 싫을 때마다 ‘그것’을 기억하라고 말해주었다.
영어로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들이 찾아오면 나는 “그래도 영어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중요하다고 계속 잔소리를 하면, 아이는 그 말이 너무 당연하다고 느껴져 오히려 별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게 된다. 이럴 때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더불어 왜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어느 정도는 분명히 설명해 주는 것이 낫다.
우리가 지식을 배우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전하려면 영어를 배울 수밖에 없다. 말을 못하고 못 알아들으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데 세계인이 가장 많이 쓰는 언어가 영어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학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심도 있게 공부하려면 영어를 안 할 수가 없다. 교재들 대부분이 영어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이제는 외국 사이트에서 필요한 자료를 검색하고 찾기 위해서는 영어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에게 자신의 필요에 의해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설명해준다. 이런 설명이 ‘영어 못하면 대학 못 간다’는 협박보다 영어 공부를 대하는 아이의 자세를 바꾸는 데 효과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올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때는 소통을 거부감 없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도였으면 좋겠다. 긴 문장이 아니더라도 외국 사람이 다가왔을 때 아이가 도망가지 않고 말할 수 있으면 된다. 소통을 하려는 의도를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 모국어를 배울 때도 완벽한 한국어로 시작하지는 않는다. 따라 하고 모방하다가 어휘가 늘어난다. 그렇게 늘어난 어휘를 가지고 의미를 이해한다. 영어도 그렇게 시작하고, 중학교에선 아주 쉬운 문법책을 접하게 했으면 한다.
기초가 없어서 영어 공부를 아예 못 하겠다는 아이들은 고등학교 1학년이라도 중학교 1학년 수준의 가장 쉬운 문법책부터 보라고 조언한다. 그것도 완벽하게 통달하려고 하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훑듯이 한 번쯤 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영어 문법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눈에 들어오면, 그것보다 약간 어려운 문법책을 골라 처음부터 끝까지 또다시 훑듯이 한 번 더 보라고 한다. 기초가 없다면 현재 학년을 무시하고 아주 낮은 단계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기초가 없는 아이들은 단어도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매일 10개씩만 쓰면서 소리를 내 외우라고 조언한다.
단어를 외울 때는 되도록 부모도 함께할 것을 권한다. 부모도 아이와 함께 단어를 외우고, 아이 앞에서 시험도 보고, 틀려도 본다. 그러면 일단 아이가 굉장히 좋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가 아이를 덜 채근하게 된다.
부모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영어에 있어서 정말 과욕을 버리라는 것이다. 영어만큼 들인 노력에 비해서 성과가 안 나오는 영역도 없다. 요즘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일주일 내내 영어 공부를 한다. 어떤 아이는 학원에서 내주는 영어 숙제를 하기 위해 과외를 따로 하기도 한다. 일주일 내내 영어 공부를 해야 영어를 잘하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영어가 어렵다는 방증이다. 이렇게 어려운 영어를 더 잘하라고 다그치지는 않았으면 한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나갈 수 있도록 부담을 좀 덜어주면 좋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