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했던 노인, 쇠약해진 이유가 약?…“꼬인 줄 풀듯 정리, 일상 돌아갔죠”[서영아의 100세 카페]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17일 07시 00분


‘지속가능한 나이듦’ 내건 젊은 의사, 노년의학을 말하다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
초고령사회 대비해 노인의학 시스템 정비 필요
더 건강해진 노인 늘어나 사회구성원 기능해줘야
‘복잡계’로 바뀌는 노년의 몸…성인과 다른 진료로 접근해야

꽃이 피었다 지듯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늙고 죽어가는 게 자연의 섭리.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늙음, 나이듦은 극도로 환영받지 못하는 대상이 돼 있다. 이런 가운데 노년내과 전문의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교수가 최근 낸 책 ‘지속가능한 나이듦(두리반)’이 눈에 띄었다. 필자는 아직 노화와는 거리가 먼 38세. 서울대병원에서 전문의가 된 걸로 모자라 노화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의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7일 만나본 정 교수는 “나이듦은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과정”이라며 “나이듦을 극복대상이 아닌 내 편, 우리 사회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화를 맞이하더라도 삶의 질에 문제가 없도록 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나이듦’이고 이는 개인 삶뿐 아니라 복지사회 정책, 고령화된 한국사회 전체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인문사회적 지식에 시사, 예술까지 관심영역이 다양하고 해박했다.

노년내과 사무실을 배경으로 선 정희원 교수. 정교수는 노화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의과학박사를 취득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노년내과 사무실을 배경으로 선 정희원 교수. 정교수는 노화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의과학박사를 취득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노년의 몸은 복잡계, 콧물약 한 알로 위독해지기도
-노인의학이 왜 필요합니까.

“노인의학은 생물학적 노화의 결과인 노쇠(frailty)와 여러 질병이 혼재된 상태에서 환자에게 맞춤 의료를 제공하는 전문분야입니다. 노화가 축적되면 몸이 바뀌는데, 사람의 몸이 ‘복잡계’로 변합니다. 각 질환들이 상호작용을 해서 예측불허의 결과를 낳기도 하고 같은 약 처방에도 성인과 다른 반응이 나타나죠. 그래서 소아과가 따로 있듯이 노인과도 따로 있어야 합니다.”

-대략 어느 연령대가 진료대상입니까.

“평균적으로 보자면 77세 정도입니다. 물론 개인차는 있습니다. 1990년대만 해도 약 65세였는데 엄청나게 개선됐지요. 간혹 가속노화(accelerated aging)를 일으키는 질병이 있는데, 이렇게 노쇠가 일어난 분들도 진료대상입니다.”

- 다약제 정리를 무척 강조합니다.

“한국 고령자의 73%가 두 가지 이상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고 평균 4.1가지 약을 복용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약이 많을수록 부작용도 늘어납니다. 환자가 복용하는 모든 약을 점검하고 꼭 필요한 약물만 취하도록 하는 것을 ‘약을 정리한다’고 하는데, 극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요. ‘잠재적 노인부적절 약제’ 리스트도 만들었습니다.”

‘지속가능한 나이듦’ 표지.
‘지속가능한 나이듦’ 표지.


‘약을 정리한다’는 뜻은
다약제 정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정 교수의 진료사례를 하나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하다.

70대 후반 A씨는 1년 여 간 대형병원들을 찾아다니다가 그에게 왔다. 온몸이 떨리고 잘 걷지 못하는 증상 때문에 온갖 검사를 받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다. 여기 더해 음식을 먹으면 구토하는 증상이 반복돼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비교적 건강했던 A씨는 불과 6개월만에 거동조차 자유롭지 않을 정도로 쇠약해져 버렸다.

정 교수는 우선 여러 의료기관을 오가며 두터워진 A씨의 의무기록 사본을 읽는 것부터 시작했다. 움직임과 떨림으로 도파민 부족을 완화시키는 약을 처방받았던 A씨의 구토증세가 심해졌고, 내과에서는 위장약 처방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간의 처방약 목록을 들여다보니 문제가 선명해졌다. 시작은 진통소염제 한 알이었다. 약사가 함께 처방했던 소화제에 도파민 뉴런기능을 떨어뜨리는 특성이 있었다. 이런 부작용은 일반인에게는 별 영향을 주지 않지만 노쇠가 진행된 A씨에게는 달랐다. A씨가 떨리는 증상에 대해 신경과에서 처방받은 파킨슨 약의 부작용도 구역과 구토였다. 구토에 대해 내과의사는 소화제를 늘려갔다. A씨가 구토증상으로는 내과의사를 찾고 떨림에 대해서는 신경과 의사를 찾았으니 두가지 치료약이 뱅글뱅글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다. 이를 전문용어로 ‘처방연쇄’라고 한다.

정교수는 ‘꼬인 이어폰 줄을 푸는 심정으로’ 10가지가 넘는 약 중 소화제와 소염제, 파킨슨 약을 포함해 3분의 2 정도를 정리했다. 그로부터 2주 뒤, A씨는 지팡이 없이 진료실에 걸어 들어와서는 ‘반년만에 밥을 먹었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약을 정리한 덕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

돈은 안되지만, 꼭 필요한 진료과
정교수는 이런 문제가 생긴 이유로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들었다.

“한국은 주치의제도가 정착되지 않아 환자가 곧바로 전문의와 만나는 시스템입니다. 여러 질병을 가진 노인의 경우 각기 다른 의사를 만나야 하는 문제가 생기죠. 의사들은 각자 약 처방을 하지만, 환자의 전체적인 질병과 처방 상황은 아무도 알기 어렵습니다. 노인의학은 개인별 맞춤 치료가 필요합니다. 사람마다 상태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A씨 같은 환자를 치료하면 할수록 병원 입장에서는 손해가 난다는 점이다. 환자의 이모저모를 다 챙기다보면 환자 당 진찰시간이 30분을 넘긴다. 한국에서 노인과를 운영하는 곳이 많지 않은 이유다. 고령화사회와 실버산업이 여론에 오르내리던 2003년 경 분당서울대병원이 급성기 노인의료 시스템을 도입했고 2009년 서울아산병원이 노인내과를 신설했다. 이후 신촌세브란스, 전남대병원 등 노인과를 개설하는 병원이 몇 군데 더 생겼지만 병원내에서 주류 진료과라 보기는 어렵다.

공공의료가 발달한 영국에서는 1950년대부터 노인병학을 중시해 현재는 내과의의 10%가 노년내과 간판을 걸고 진료한다. 의사협회는 반대했지만 영국 정부가 강력하게 밀어부쳤다.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각 과별 진료처방보다 노인병 전담이 있는 것이 효율적이고 재정을 낮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캐나다 호주 등 영연방계통 국가들도 노인의학이 매우 발달해 있다.

동료들과 상의하는 정희원 교수.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동료들과 상의하는 정희원 교수.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노년내과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기적
노년 내과에서는 다른 진료과 컨설팅을 통해 날마다 ‘기적’이 일어난다.

“노쇠가 진행된 환자의 경우 진료과에서 문제해결이 잘 안되면 저희에게 문의가 옵니다. 오늘도 재활의학과에서 의뢰가 있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노인인데, 차트를 보니 노인에게 절대 쓰면 안 되는 항콜린성 약을 쓰고 있었어요. 그 약을 끊게 했는데 3일 지나면 깨어나신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그가 노년내과를 지망하게 된 계기도 수련의시절 응급실에 실려온 노인환자에 대해 선배의사가 특정약을 처방에서 뺀 것만으로 며칠 만에 멀쩡해지는 모습을 본 거였다.

“속도가 빠르고 효과가 드라마틱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지요. 노인환자들은 아주 사소한 요소로도 상태가 나빠져요. 의식 떨어뜨리는 약 하나 잘못 쓰면 못 먹고 못 움직이고 그러다보면 금방 와상 상태가 되고 그럼 또 욕창이 생기고…. 생명 위독해지는 데까지 일주일이면 될 겁니다. 반대로 그 직전에 원인을 찾아내 제대로 해결해놓으면, 깨어나서 먹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3개월 내에 평소대로 회복되는 선순환 사이클도 만들 수 있지요. 힘들고 돈이 안 되도 노인의학이 재미있고 보람되다고 느끼는 순간이죠.”

-그런 보람의 순간이 자주 있나요.

“거의 매일 있어요. 이게 지적인 쾌감을 줍니다. 환자가 어려움을 겪는 꼬인 곳을 ‘탁’ 풀어내면 환자가 ‘뿅’ 좋아져서 며칠 뒤 외래에 걸어서 들어오시는 거예요. 하하. 그런 환자들일수록 굉장히 고마워하시기 때문에 저도 버텨나갈 힘이 되지요.”

현대사회가 가속노화를 부르는 요인들 가속노화를 부르는 갖가지 요인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악순환을 일으킨다.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현대사회가 가속노화를 부르는 요인들 가속노화를 부르는 갖가지 요인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악순환을 일으킨다.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노화지연의 비결은 더하기보다 덜어내기

-노쇠를 늦추고 싶은 중장년에게 조언을 주신다면.

“노화 속도를 줄이는 것은 대개 무언가를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겁니다. 먹는 것, 번뇌, 스트레스, 영양제도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내 몸에 득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대신 채워야 할 것은 잠, 운동, 섬유질 채소, 머리 비우는 시간이죠. 이것들은 노화와 동반되는 만성염증이나 대사적 이상과 연관이 있고, 가속노화와 악순환을 거꾸로 돌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노화지연에는 절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작은 것 덜어내서 얻는 효과가 생각보다 큰데 사람들은 그에 대해 너무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자꾸 새로운 것을 보태고 찾는데 시간과 돈을 많이 쓰죠. 사실 술을 매일 마신다는 것은 꼬박꼬박 혈압 올리는 약을 먹는 것과 같죠. 술 마시고 혈압 조절약 먹고…. 이게 다 노화를 가속화하는 겁니다.”

-모두가 절식을 말하지만 실천이 쉽지 않습니다.

“시작은 간단합니다. 단순당과 정제곡물만 줄이면 됩니다. 이 상태를 몸이 경험하게 하는 거죠. 단순당이나 정제곡물로 식사를 하면 체내에 당도가 올라갔다 내려가면서 코티솔이 나와 다시 식욕을 당깁니다. 그런 악순환이 사라지게 되면 칼로리 섭취는 무조건 줄어듭니다. 환자들에게 설명해드리면 쉽게들 실천하세요. 그러면 한두 달이면 효과가 나타나고 6개월마다 약 하나씩 끊을 수 있어요. 선순환 사이클을 만드는 겁니다.”

다만 그는 노화지연을 위한 절제는 젊어서부터 30~40년 간 실천해야 할 일이라고 못박았다. 가끔 노쇠가 온 어르신들이 뒤늦게 실천하시면서 근육이 더 빠져서 진료실로 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

그는 요즘 우리 사회가 가속노화를 재촉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고 진단한다.

“요즘 유행하는 ‘욜로족(한번 태어난 인생, 현재를 즐기며 산다)’도 ‘파이어족(하루빨리 경제적 자유를 얻고 은퇴한다)’도 일종의 가속노화라고 생각해요. 과도한 것은 좋지 않아요. 과도한 운동도, 과로도, 스트레스도 가속노화를 일으키죠.

그는 이 대목에서 ‘호르메시스’(가벼운 스트레스나 소량의 독이 오히려 건강에 이로움을 주는 현상)에 대해 긴 설명을, 정말 성의있게 이어갔다.
더 건강해진 노인들이 사회 구성원 역할해야
-지속가능한 사회시스템은.

”항간에서 한국의 급속한 고령화를 논하며 마치 우리 사회에 종말이 올 것처럼 분위기를 띄우지만, 고령 사회구성원이 늘어나는 게 파멸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복지정책은 지금같은 방식은 곤란합니다. 65세가 약자인 것은 수십 년 전 얘기입니다. 노년내과 기준으로 보자면 한국인의 건강상태는 워낙 좋아 평균적으로 77세까지는 경제할동을 할 수 있습니다. 노인빈곤율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분들의 기능이 좋아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에 맞춰 사회보장도 서구선진국처럼 뒤로 미뤄야 합니다. 지금 추세에서, 65세 이상을 복지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면 폭증하는 부양비 탓에 미래 세대의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아요.“

결론은 자연스레 노인의학의 중요성으로 귀결된다.

”이를 위해서도 노인의학이 제대로 기능해야 합니다. 고령자들의 기능저하와 간병부담을 막는 게 중요하죠. 병은 치료했는데 사람은 쇠약해져 와상상태로 만들어서는 곤란합니다. 더 건강한 노인이 많아지면 이 분들이 부양 대상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 참여해 생산인구로 기능해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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