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줄곧 연극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왔어요. 관객이 평소 생각지 못했던 걸 생각해볼 수 있도록 질문하는 게 연극과 배우의 역할 아닐까요.”
이달 1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TOM2관에서 뮤지컬 ‘실비아, 살다’가 개막했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제한됐던 1950~1960년대에 불운한 삶을 산 미국의 여류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재창작했다. 지난해 7월 초연이 관객 호평을 받으며 약 6개월 만에 다시 공연된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실비아의 가부장적인 남편 테드 역할을 맡은 배우 김세환(35)을 23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살면서 춤을 제대로 춰본 적 없다는 그에게 ‘실비아, 살다’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2015년 연극 ‘백세개의 모노로그’로 데뷔 이후 30여 개 작품에서 활약했지만 뮤지컬은 처음이다. 전부 합쳐봐야 2분 남짓에 불과한 안무를 좀처럼 외우지 못해 같은 배역을 맡은 동료 배우 문지수를 계속 붙들고 연습했다.
“춤은 영 ‘꽝’인지라 배운 걸 잊지 않으려고 대학로를 걷다가도,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도 동작을 반복했어요. 악보를 볼 줄 몰라서 넘버 익히는 것도 난관이었죠. 작곡가가 직접 불러준 AR을 하루 종일 들으며 외웠습니다(웃음).”
다양한 캐릭터를 오가는 가운데서도 그는 자신만의 메시지가 확고한 배우다.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희생된 삶들을 다룬 연극 ‘빵야(2023)’, 퀴어소설 원작의 연극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2021)’ 등에 출연했다. 올해 제59회 동아연극상에선 한국 남성의 정체성과 여성 차별의 역사를 짚어낸 연극 ‘한남(韓男)의 광시곡(狂詩曲)’으로 연기상을 수상했다.
”작품을 고를 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아픔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을까’를 고민해요. 작품 앞에서의 태도와 평상시의 태도가 일치하도록 노력도 하고요. 뮤지컬은 해본 적 없어 두려웠지만 여성서사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실비아, 살다’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그가 배우의 꿈을 꾸게 된 건 고등학생 때부터다. 친구 따라 들어간 연극반에서 학생극 ‘다녀오겠습니다’의 조연을 맡은 이후 꿈도 목표도 없던 그에게 연기라는 꿈이 생긴 것. 대학 진학을 준비하며 어머니와 입시 상담을 받은 것이 트리거(trigger·방아쇠)가 됐다. 그는 “다른 학생에겐 친절하던 상담 선생님이 추레한 우리 행색을 보자 돌변하던 순간 오기가 생겼다”며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이후에도 학교에서 먹고 자며 계속 연습에만 매진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드라마에도 발을 담그며 작품 영역을 넓히고 있다. tvN 드라마 ‘일타스캔들’에서 최치열 역의 배우 정경호에게 술집에서 시비 거는 인물로 등장했다. 정경호와는 지난해 2월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로 호흡을 맞추며 연이 닿았다. 그는 “놀라게 해주려고 경호 형한테는 비밀로 한 채 오디션에 참가했다”며 “카메라에 둘러싸여 연기하는 게 처음이라 너무 떨렸는데 경호 형과 다흰이 형(전종렬 역) 덕에 무사히 끝냈다”고 했다.
차기작은 서울시극단이 4월부터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선보이는 연극 ‘키스’다. 객원 단원으로 참여해 주연 유세프 역을 맡는다. 칠레 극작가 기예르모 칼데론 원작 연극으로 지난해 새로 발탁된 고선웅 예술감독과 우종희 연출이 국내 초연을 이끈다.
“배우라면 누구나 관객에게 사랑받는 역을 맡고 싶죠. 하지만 새 작품에서도 비겁하고 찌질한 연기를 보여드리게 될 것 같아요(웃음). 비겁한 어른이 되지 말자는 다짐으로 제 안의 비슷한 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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