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건강, 정서 문제 등 마음(心) 깊은 곳(深)에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일상 속 심리적 궁금증이나 고민이 있다면 이메일(best@donga.com)이나 댓글로 알려주세요. 기사로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서부 유럽 바닷가 항구에서 보트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어부가 있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관광객은 어부에게 “날씨가 좋은데 왜 고기를 잡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부는 “필요한 만큼 이미 충분히 잡았다”고 답했다. 관광객은 답답해하며 “당신이 두 번, 세 번, 아니 그 이상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면 더 많은 돈을 벌 것”이라며 “1년쯤 뒤면 모터보트를 살 수 있고, 나중에는 어선도 사고, 냉동 창고, 훈제생선 창고, 공장, 헬리콥터까지 사게 될 것”이라고 열을 올렸다. 어부는 “그런 다음은요?”라고 되물었다. 관광객은 “그런 다음 이 항구에 앉아 햇살과 풍경을 즐기면 된다”고 했다. 어부가 답했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잖소.”
노벨 문학상을 받은 독일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1972년 쓴 ‘노동윤리 몰락에 관한 일화’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미국 사업가와 멕시코 어부 등으로 각색돼 여러 버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짧은 이야기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 속 관광객처럼 성공을 이루고 난 뒤에야 햇살을 즐기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기며 산다. 쉬거나 낮잠을 자면 스스로도 비생산적이고 게으르다고 여긴다. 하지만 여러 연구에 따르면 휴식은 더 많은 성취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피로를 푸는 것부터 산책, 대화, 취미 생활 등을 통해 정신적 만족감을 얻는 모든 순간을 휴식이라고 할 수 있다. 휴식을 취하고 업무에 복귀했는데도 여전히 정신이 멍하고 피로감이 남아 있다면 잘 못 쉬었다는 증거다. 어떻게 해야 ‘잘’ 쉴 수 있을까?
능동적으로 휴식 시간을 쟁취하라
쉬는 시간을 내 뜻대로 선택하는 것부터가 진정한 휴식의 출발점이다. 쉬는 시간이 주어질 때 수동적으로 쉬는 게 아니라 쉬고 싶은 타이밍에 적극적으로 쉬어야 한다.
로버트 사폴스키 미국 스탠퍼드대 생물학과 교수는 아프리카 세렝게티에서 30년간 개코원숭이를 관찰하며 스트레스에 관한 연구를 했다. 먹고 자는 시간을 우두머리 수컷에게 통제당하는 서열 낮은 수컷 원숭이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우두머리 수컷에 비해 스트레스 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됐다. 자기 삶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눈치 보며 사는 서열 낮은 원숭이는 스트레스 때문에 더 많은 질병에 걸렸고 결과적으로 수명도 짧았다.
안타깝게도 인간도 마찬가지다. 원할 때 쉬지 못하고 눈치 보며 쫓기게 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도하게 분비될 수밖에 없다. 1~2시간가량 업무에 열중했다면 10분이라도 짧은 자유시간을 반드시 지키는 등 자신만의 규칙을 정해두면 도움이 될 수 있다.
일을 멈춰야 비로소 활동을 시작하는 뇌
뇌 과학 분야에서는 쉬어야 능률이 오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수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마커스 라이클 미국 워싱턴대 의대 교수는 휴식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특정 부위를 찾아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2001년 발표한 ‘뇌 기능의 기본 모드’라는 논문에서 뇌의 이 영역을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고 소개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돌아가는 뇌의 기본 모드라고 볼 수 있다.
수많은 후속 연구에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창의력, 집중력, 기억력, 공감, 정서적 판단, 정신건강 등과 관련된다는 것이 입증됐다. 이에 따르면 쉬는 동안 뇌는 기억을 저장하고, 창의성을 발휘해 조용히 해결책을 모색한다. 골똘히 몰입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샤워를 하거나, 산책하다가 불현듯 기막힌 방법이 생각났다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일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TV를 본다거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유튜브 영상을 보는데 정신이 팔렸다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일하는 데 방해가 된다. 라이클 교수가 처음 발표한 논문에서 실험 참가자들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도록 조성한 조건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눈을 감고 조용히 쉬도록 한 상태였다.
자연이 주는 집중력의 힘
자연을 보고 듣는 것도 집중력을 높이는 좋은 방법이다. 야외에 나가는 것이 가장 좋지만, 실내에서 녹음된 자연의 소리를 듣거나 자연 풍경이 담긴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집중력을 향상할 수 있다.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과 연구팀은 2018년 자연의 소리가 인지 능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먼저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시각과 청각의 집중력이 필요한 사전 인지능력 테스트를 했다. 그런 다음 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에는 파도, 비, 귀뚜라미, 바람 소리가 녹음된 자연 음향을 들려줬고, 나머지 그룹에는 자동차 경적, 기계 동작 소리, 카페의 백색소음 등 도시와 관련된 음향을 각각 15분간 들려줬다. 그런 뒤 다시 인지 능력 테스트를 치르게 했다. 그 결과 도시 음향을 들은 참가자들은 점수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자연 음향을 들은 참가자들의 점수는 사전 테스트에 비해 크게 향상됐다.
이에 앞서 마크 버만 시카고대 심리학과 교수는 유사한 설계의 실험을 통해 수목원을 산책한 그룹과 도심을 산책한 그룹의 인지능력을 비교 테스트했다. 그 결과 수목원을 산책한 이들이 인지능력이나 정서 상태에서 더 나은 결과를 보여줬다. 또 다른 유사 실험에서는 자연 사진을 본 실험군이 도심 사진을 본 대조군에 비해 인지 능력이 더 상승했다.
기쁨으로 몰입할 수 있는 취미 찾기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장 효과적인 휴식은 즐거운 일에 몰입하는 것이다. 휴일에 소파에서 온종일 넷플릭스를 보거나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면 몸의 피로가 어느 정도 회복될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의 정신적 만족감을 느끼긴 어렵다. 너무 바빠 쉴 시간이 없다고 아우성치면서 막상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뭘 할지 몰라 ‘쉬는 날엔 할 게 없다’라는 안타까운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여유 시간이 더 많은 은퇴 후라면? 재미없는 삶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정신적 만족감을 높이는 휴식을 취하려면 심신의 이완뿐만 아니라 시간과 관심을 쏟아 몰입을 일으키는 도전적인 취미 활동이 필요하다. 긍정 심리학의 대가이자 몰입(flow)의 개념을 처음 역설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과 교수는 저서 ‘몰입의 즐거움’에서 “여가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면 일할 때처럼 창조력을 발휘하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취미의 필수 조건은 너무 쉽거나 어렵지 않은 ‘적당히 도전적인’ 난이도여야 하고, 스스로 즐거움을 찾기 위해 나서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취미 활동도 일하듯 무조건 열심히 하라는 뜻은 아니다. 정신과 의사이자 ‘오티움(라틴어로 ‘여가’라는 의미)’의 저자 문요한 원장은 “좋은 여가 활동의 포인트는 ‘기쁨’”이라며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자랑하거나, 살을 뺀다거나,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활동은 좋은 취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무엇을 취미로 삼아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다면 자기 탐색 과정이 먼저다. 문 원장은 “어린 시절부터 몰입했던 경험을 찬찬히 되짚어 보면서 잊고 살아왔던 것은 무엇인지, 나와 비슷한 기질과 환경을 가진 가족들은 어떤 취미를 가졌는지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객관적으로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며 “나의 여러 능력 가운데 비교적 잘 할 수 있고, 흥미를 느끼는 영역을 찾으면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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