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노벨상’ 1년 맞는 허준이 교수
연구실 책상엔 노트-샤프-모래시계… 자극 피하고 연구 몰두위해 단출
새 생각 방해될까 논문 읽기도 참아… 점심 식사 메뉴도 몇달째 똑같이
내달 ‘수학난제연구소’ 개소식 참석
“연구에 목표는 없어요. 목표가 일시적으로 동기 부여가 될 수는 있겠지만, 목표 설정 자체가 그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해 한국계 수학자 최초로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40·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의 연구실. 필즈상 수상 1주년을 앞둔 5일(현지 시간) 기자가 방문한 미국 프린스턴의 연구실 책상엔 노트 뭉텅이, 샤프펜슬, 1L 우유팩만 한 모래시계가 전부였다. 바닥엔 요가매트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연구실이 단출한 이유를 묻자 그는 “다른 자극을 피하고 연구에만 몰두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저는 자극적인 것에 약한 사람이에요. 잘 중독되죠. 그래서 일상을 깨뜨릴 수 있는 자극은 거의 피합니다.”
지난해 7월 필즈상 수상으로 대중 강연, 기자회견 등 시끌벅적한 시간을 보낸 뒤 같은 해 9월 미국에 돌아온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연구에 방해되는 일을 모두 중단한 것이다. 필즈상 수상 전 일상으로 완벽히 돌아갔다. 오전 3시에 일어나 조용히 앉아 명상하거나 조깅하고 오전 9시에 학교에 도착해 오전은 연구로 보낸다. 오후 5시에 퇴근하면 오후 9시에 잠드는 일과다. 연구와 관련 없는 대중 활동은 지난해 아들의 학교 반 친구 7명 앞에서 수학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하는 짧은 강연이 전부였다.
그에게 연구실에 놓인 요가매트와 모래시계의 쓰임새를 물었다. 요가매트는 종종 누워서 생각할 때 쓴다는 답이 돌아왔다. 떠오른 생각을 직접 손으로 노트에 써 내려가며 정리한다. 모래시계가 잴 수 있는 시간은 15분이다. 허 교수가 집중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는 “집중력이 약한 제가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이 모래시계로 잴 수 있는 15분”이라며 “깊은 생각이 필요할 때는 모래시계를 한 번 뒤집어서 집중했다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뒤집는 과정을 반복하며 연구한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엔 혼자 슬그머니 연구실을 나와 식당으로 향한다. 어제도, 그제도, 일주일 전에도, 지난달에도 갔던 똑같은 식당, 똑같은 메뉴다. 한 중동 음식 전문점의 ‘샤와르마’(케밥처럼 구운 고기를 빵에 싸 먹는 중동 요리)다. 허 교수는 “새로운 음식을 고르고 맛보면 정신이 산만해지는데, 일종의 불필요한 자극이어서 일상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구에 방해받지 않는 데 초점을 맞춰 자신의 일상을 제한하는 셈이다.
좋아하는 노래도 너무 빠져들까 봐 연구할 때는 아예 듣지 않는다. 심지어 읽고 싶은 논문이 있어도 꾹 참을 때가 있다. 그는 “수학 연구는 능동적으로 생각하며 하는 것”이라면서 “논문을 많이 읽으면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데 방해가 된다”고 했다. “기존 연구 혹은 유행하는 연구를 조합해서 연구 성과를 내려는 얄팍한 마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자신의 연구실 외에 연구를 위해 찾는 공간은 3층 건물인 프린스턴 공공도서관이 유일하다. 그중에서도 어린이 도서 코너가 있는 3층을 즐겨 찾는다. 그는 “도서관의 암묵적인 규칙인지 모르겠지만 성인 도서 코너가 있는 1, 2층은 너무 조용해서 작은 소리도 안 내려고 신경 써야 해 오히려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동료를 3층으로 데려가 연구 이야기를 나누는데, 물론 오후 3시가 지나면 하교한 어린이들이 너무 많아 대화하기가 어렵다”며 웃었다.
허 교수가 지금 보내는 일상과 루틴에는 이유가 있다. 필즈상 수상으로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1년 전 그는 연구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인터뷰와 강연, 대담은 물론이고 TV 출연 제안, 도서 출간 제의 e메일이 허 교수의 메일함으로 쏟아졌다. 허 교수 처지에선 일상이 깨진 셈이었다.
유명해진 김에 잠시나마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 연구를 쉴 법도 하지만 허 교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구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한순간에 끊어낼 만큼 수학에 욕심내는 이유는 뭘까. 돌아온 그의 대답은 너무 단순했다. 여전히 지금도 수학이 재밌기 때문이라는 답이다.
“수학을 왜 해야 하냐고 물으면 사실 꼭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건 아니죠. 그런데 그 사실을 알아야 수학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수학을 꼭 해야 한다고 당위성을 부여하면 수학에 재미를 느낄 수 없을 것 같아요.”
필즈상 수상 이후 새 연구논문도 공개됐다. 수상 분야인 대수기하학을 통해 조합론 문제를 해결하는 ‘조합 대수기하학’ 논문으로 1980년대 제시된 조합론 추측인 ‘브릴로스키의 추측’과 ‘도슨-콜번의 추측’을 대수기하학으로 해결한 내용이다. 그레이엄 데넘 미국 웨스턴대 교수, 페데리코 아르딜라 미국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교수와 공동 연구한 논문을 올 상반기 발행한 수학 분야 학술지 ‘미국수학회보’에 발표했다.
허 교수는 이번 연구논문을 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감자를 보여주고 상대방이 감자 모양이 어떤 건지 바로 알아차리게 할 순 있지만, 사진 없이 모양을 묘사해서 알아차리도록 하려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필즈상 수상자는 한 분야에서 자신을 증명했으니 새로운 분야에서도 능력을 보이고 싶어 연구 분야를 바꾸는 경우가 적지 않다. 허 교수는 “배우는 속도가 빠른 편이 아니라서 지금 와서 다른 분야로 바꾸면 아마 논문 하나 쓰는 데 10년이 걸릴 것”이라면서 웃었다.
여전히 공동연구도 열심히 하고 있다. 방문 직전인 5월 말에도 4명의 공동연구자가 허 교수 연구실을 방문해 일주일 정도 집중 연구를 했다.
허 교수는 고등과학원 석학교수로 조만간 한국을 찾아 연구를 진행한다. 7월 초 서울에서 열리는 ‘제1회 세계한인과학기술인대회’에 참석한다. 필즈상 수상을 계기로 7월 19일 문을 여는 고등과학원 수학연구소 ‘허준이수학난제연구소’ 개소식에도 참석한다.
살면서 ‘목표’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선 조금 색다른 의견을 내놨다. “어려운 목표라면 분명히 언젠가 가까이 가기 어려운 지점이 생길 텐데 그런 지점을 맞닥뜨렸을 때 마음이 힘들고 잡념이 생기잖아요. 목표를 가지지 않는 게 앞으로 나아갈 때 산만해지지 않는 방법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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