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金보다 더 잘한 게 금연”… 유도 ‘악바리’ 김재엽, 담배와의 전쟁[이헌재의 인생홈런]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17일 12시 00분


‘유도 레전드’ 김재엽 동서울대 교수가 연구실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다. 1년 전 암수술을 받은 그는 순조롭게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성남=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김재엽 동서울대 교수(60)는 1988년 추석 당일이던 9월 25일 서울올림픽 유도 남자 60kg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예선 첫 경기부터 결승까지 상대 선수에게 한 점도 허용하지 않으며 승승장구하던 김재엽은 결승전에서 미국의 신예 케빈 아사노를 꺾고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품에 안았다. 그는 추석에 맞춰 한복 차림으로 시상대에 올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당시 쾌거를 “‘악바리’가 멋진 한가위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1면 톱기사로 내보냈다.

‘악바리’는 김 교수의 선수 시절 별명이었다. 남들보다 훈련량이 훨씬 많았고, 매트 위에서는 포기라는 단어를 몰랐다. 그가 다녔던 대구계성고는 국내대회단체전 16연패의 대기록을 세웠는데 김 교수 개인적으로는 100연승 이상을 거뒀다. 그리고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며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하게 됐다.

그곳에는 그는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맛보게 된다.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던 그는 결승전에서 호소카와 신지(일본)에게 누르기 한판패를 당해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은메달의 기쁨보다는 금메달을 놓친 아쉬움이 더 컸다. 그 대회에서 선배 하형주는 남자 95kg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는 “금메달과 은메달의 차이가 천양지차였다. 꼭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올림픽에서 정상에 오른 뒤 은퇴하겠다고 공언을 했다”고 했다.

1988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확정지은 순간 김재엽 교수가 하늘을 보면서 환호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1988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확정지은 순간 김재엽 교수가 하늘을 보면서 환호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4년 뒤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그것도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에 이뤄낸 값진 금메달이었다. 한국 올림픽 역사에서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나 설날에 금메달을 딴 경우는 단 두 번 있었다. 그가 첫 번째였고, 그로부터 30년 후인 2018년 2월 15일 ‘아이언맨’ 윤성빈(29)이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스켈레톤에서 금메달을 딴 게 두 번째였다. 두 사람 모두 응원해 준 국민들에게 큰절을 하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그이지만 1년 전 이맘때 큰 수술을 받았다. 전립선암 3기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오른 것이다. 다행히 골수암으로 전이가 되기 전 발견돼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사람 일은 모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수술을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다행이었다”고 했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김재엽 교수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아일보 DB
1984년 LA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김재엽 교수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아일보 DB


그는 과도한 음주와 흡연을 병마가 찾아온 원인으로 꼽았다. 특히 45년 넘게 입에 달고 살아온 담배가 문제였다.

그는 “어릴 적 유도를 할 때만 해도 코치들이 선수들에게 담배를 권유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나쁜 마음으로 그랬던 게 아니라 한창 클 나이의 선수들이 군것질을 하다가 체중이 늘어날 것을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다.

그도 그동안 금연을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혹에 번번이 무너졌다. 세계에서 가장 유도를 잘했던 악바리도 이겨내기 힘든 게 담배의 유혹이었다. 하지만 수술을 앞두고 담당 의사로부터 그는 “암세포가 가장 좋아하는 게 담배의 니코틴 성분”이라는 말을 들은 후 단칼에 담배를 잘라냈다. 그는 “막상 끊어보니 백해무익한 담배를 그동안 왜 그렇게 피웠나 하는 후회와 반성을 많이 했다. 내 인생에서 올림픽 금메달도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금연이야말로 더욱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재엽 교수가 축구 예능프로그램에서 발군의 축구 실력을 뽐내고 있다. JTBC 화면 캡처


그가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한 뒤 지도자로 변신했지만 이후 유도계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편파 판정에 대한 항의와 유도계 파벌에 대한 문제 제기 등으로 주류 유도계에서 밀려난 것.

사업으로 진로를 틀었지만 처음 해 본 사업이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때마침 외환위기가 터지고 큰 사기까지 당하면서 그는 그동안 벌어놓은 돈까지 모두 잃었다. 그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절감했다. 정말 막막한 시절이었다. 대인기피증이 걸렸고 자해와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명예회복을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공부였다. 인생의 마지막을 공부에 걸어보기로 하고 당시로는 우리나라에 생소하던 ‘경호학’ 공부에 몰두했다.

그는 “이대로 무너질 수가 없어 책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었다”며 “너무 졸릴 때는 반창고를 눈꺼풀에 붙여서 억지로 눈을 뜬 채 공부를 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이 운동 선배였는데 정말 혹독하게 나를 다뤘다. 언젠가 하루는 너무 화가 나 욕을 하면서 싸운 적도 있다”며 “하지만 결과적으로 너무 감사한 일이다”라고 했다.

2004년부터 동서울대에서 강의를 맡아 2006년 교수로 임용된 그는 “어느덧 이 학교에 20년가량 재직하고 있다. 그동안 배출한 제자들 중 경찰이나 경호실에 간 학생들도 있고, 병원 관련 일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너무 행복하고 보람된 일”이라고 말했다.

티칭 프로 자격증을 갖고 있는 김재엽 교수. 생애 베스트 스코어는 4언더파다. 김재엽 교수 제공


암 수술 후 한동안 기력이 약해졌던 그는 현재는 좋아하던 축구까지 할 정도로 건강을 회복한 상태다.

그는 몇 해 전 한 축구 예능 프로그램에서 현란한 개인기와 골 결정력을 선보이기도 한 ‘조기축구 마니아’다. 그는 “사실 대구 남산초등학교에 다닐 때 축구 선수를 했다. 그런데 축구부가 갑자기 해체되면서 유도로 종목을 바꾸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축구는 이후에도 그의 인생의 동반자나 마찬가지다. 유도 지도자를 할 때도 축구를 했고, 오랫동안 이덕화와 최수종 등이 소속된 연예인 축구단 일레븐FC에서 뛰고 있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씩 토요일마다 일레븐FC에서 공을 찬다. 그는 “부상 위험이 있는 축구가 다소 과격한 운동이기 하지만 격투기를 한 사람들에게는 공을 갖고 하는 일종의 레크레이션같은 종목”이라며 “하지만 엄청난 유산소 운동이자 심폐지구력이 도움이 되는 운동이다. 수술 후에도 축구를 통해 많이 건강해졌고, 지금도 축구로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공 하나로 전국을 다니며 다른 사람들과 유대를 맺을 수 있는 소중한 운동”이라고 말했다.

김재엽 교수는 젋은 시설부터 수상 스포츠도 즐겨 왔다. 김재엽 교수 제공


그는 축구 뿐 아니라 골프에서도 ‘프로’다. 화이트 티를 기준으로 70대 타수를 기본으로 치고 가끔씩은 3, 4언더파를 기록하기도 한다. 말로만 프로가 아니라 ‘티칭 프로’ 자격증을 갖고 있다.

그는 “지금은 ‘경호스포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처음 왔을 때는 그냥 ‘레저학과’였다. 경호를 전공한 내가 딱히 가르칠 게 없어 평소 잘하던 골프를 가르쳤는데 ‘왜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 골프를 가르치느냐’라는 민원이 들어왔다”며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몇 달간 죽기살기로 골프에 집중해서 연습해 몇 달 만에 프로 자격증을 땄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윈드 서핑 자격증과 수상 스키 자격증, 보트 조정 면허 등을 틈나는 대로 땄다.

그는 “한 번 아파 보니까 돈과 권력 등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건강이 최고다. 앞으로는 몸에 나쁜 것은 하지 않고 꾸준히 운동하면서 건강하게 사는 걸 인생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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