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이 아깝지 않으려면[생사의 사이에서/박승정]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3일 23시 42분


하루는 지팡이를 짚고 들어선 90세 할머니 환자분이 진료가 끝나고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게 물었다. “나, 무슨 음식을 조심해야 해요?” “오메가3는 먹어도 되나요?” 내가 웃으며 “드시고 싶은 것, 맛있는 것 마음껏 다 드세요”라고 하자 환자도 웃으며 겸연쩍게 자리를 떴다. 이 치열한 삶에 대한 욕구는 어디서 오는 걸까? 하긴 김형석 교수님은 65세부터 인생의 황금기라 했다. 내가 의사가 되어 막 환자를 보기 시작했을 때엔 70세가 넘는 노인 환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어느덧 나도 그 나이에 이르렀다.

박승정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교수
박승정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교수
병원에서는 응급 심폐소생술을 알리는 ‘코드블루’ 사인이 하루에도 수십 건 방송된다. 그리고 내 방 바로 옆 중환자실에서 죽은 사람이 들려 나간다. 난 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일을 계속한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죽음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요즘 들어 부쩍 지인의 장례식이 많아졌다. 20∼30년 봐 드리던 환자, 그리고 선배님들. 작고하신 선배 중 한 분은 사진작가로 같이 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사랑하세요!”란 말이 생각난다. 한 분은 정치인으로 늘 가난한 사람들을 걱정하셨는데 종종 “난 아플 시간이 없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췌장암을 앓던 고등학교 동창, 20년 넘게 같이 일한 시술방 젊은 간호사, 얼마 전엔 젊은 후배 의사가 병원 앞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어린 제자가 집사람을 잃었다고 하여 장례식장에 다녀왔는데, 제단을 지키는 어린 두 딸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이 들어 주위에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대하면서야 비로소 새삼 소스라치듯 죽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늦둥이를 위해 아직 더 벌어야 하는데,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야기 나누는 중에 갑자기 책 제목이 기억나지 않거나 예전에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배우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 더욱 그렇다. 갑자기 오늘이 중요해지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되고, 한순간 한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다시 김형석 교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간다. “공부하는 삶은 늙지 않는다!” 최근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나이 든 친구들도 있고 젊은 친구들도 있다. 젊은 친구들과의 모임이 즐겁다. 새로운 것, 모르는 것을 이야기하면 재미도 있고, 배우는 것이 많다.

얼마 전에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눴다. 미래와 더불어 행복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좋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맛있는 것을 먹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니 공부하면서도 즐겁고 행복하지 않은가. 사실 공부라는 게 비단 책을 읽고 지식을 학습하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독서도, 젊은 사람들과의 만남도,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것도 다 인생의 공부다. 더불어 행복하니 좋지 아니한가. 남은 인생, 이런 삶이라면 나이 듦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그날따라 북클럽 회원들과 함께 하는 소주가 달았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행복의 기원#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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