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金→햄버거집 사장→美 양궁장 대표…서향순 “양궁이 내게 준 선물”[이헌재의 인생홈런]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8일 12시 00분


한국 양궁의 초석이 된 김진호(왼쪽)와 서향순. 1984년 LA 올림픽에서 서향순이 금메달, 김진호가 동메달을 땄다. 한국 양궁의 레전드인 둘은 당시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절친한 사이다. 뉴스1


지난달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평화의광장에서 열린 제3회 현대자동차 정몽구배 한국양궁대회에서는 정식 경기가 모두 끝난 후 특별한 이벤트 경기가 펼쳐졌다. 세계 최강 한국 양궁의 초석이 된 두 명의 ‘양궁 레전드’ 김진호 한국체대 교수(62)와 서향순 HSS스포츠아카데미 대표(56)가 모처럼 후배 선수들과 함께 활시위를 당긴 것이다.

한국 양궁 60주년을 맞아 기획된 이 이벤트에서 두 사람은 여전한 클래스를 보여줬다. 수십 년만에 활을 들고 수많은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대에 올랐지만 어김없이 과녁을 꿰뚫었다. 김진호는 첫 발에 7점, 두 번째 발에 8점을 쐈다. 첫 발에 5점으로 흔들렸던 서향순은 두 번째에는 9점을 기록했다. 미국에 거주하다 이번 대회를 위해 한걸음에 한국으로 날아온 서향순은 “대회를 앞두고 딱 이틀 연습했다. 처음 경기장에 들어갈 때만 해도 너무 떨릴 것 같았는데 막상 사대에 올라서니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아마 우리 후배 선수들도 같은 기분일 것 같다. 한국 양궁만의 DNA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안경쓴 고교생 서향순이 1984년 LA 올림픽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동아일보 DB
안경쓴 고교생 서향순이 1984년 LA 올림픽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동아일보 DB


8일 끝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양궁은 금메달 4개, 은메달 4개, 동메달 3개를 쓸어 담았다. 특히 올림픽 정식종목인 리커브 양궁 5종목에서는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따내며 내년 파리 올림픽에서의 ‘금빛 낭보’를 기대케 했다.

한국 양궁은 2021 도쿄 올림픽까지 역대 올림픽에서 금메달 27개, 은메달 9개, 동메달 7개 등 총 43개의 메달을 수확 중이다. 올림픽에서 한국 양궁의 금맥을 처음 캐기 시작한 게 바로 서향순과 김진호다. 두 사람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특히 서향순의 금메달은 한국 여자 선수 첫 올림픽 금메달이자, 역대 한국 선수단이 올림픽 기록경기에서 따낸 첫 금메달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양궁 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서향순. 한국 양궁 6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해 의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이헌재 기자


서향순의 금메달은 역대급 이변이었다. 당시 모든 이들이 김진호의 금메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79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에 오른 김진호는 대회 전 각종 기록에서 경쟁자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대회가 시작되자 김진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진에 빠졌다. 0점을 두 차례나 기록하는 등 동메달을 딴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할 만했다.

반면 이전까지 국제대회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던 당시 17세의 서향순은 거칠 게 없었다. 연일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마지막 날 대역전 우승을 거뒀다. 금메달의 기쁨과는 별개로 서향순은 대선배 김진호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김진호는 오히려 “향순아 고맙다. 네가 금메달을 따줘서 언니가 욕을 덜 먹는다”고 서향순에게 축하를 건넸다.

서향순은 “많은 사람들이 언니와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다. 그런데 내가 지금도 가장 친하게 지내는 게 진호 언니다. 한국에 올 때마다 만나고, 미국에 있을 때도 한 달에 한두번은 통화를 한다”며 “진호 언니야말로 진정한 대인배다. 내가 금메달을 따고 난 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와 인터뷰 방법 등을 세심하게 알려준 것도 진호 언니다. 본인이 가장 마음 아팠을 순간에도 후배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셨다.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언니”라고 말했다.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던 2000년대 초반의 서향순.  동아일보 DB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던 2000년대 초반의 서향순. 동아일보 DB


서향순의 양궁 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LA 올림픽 이듬해인 1985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을 제패하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이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뒤 은퇴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박경호(60)와 결혼한 그는 충북 충주에서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다가 2004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아들과 딸 교육을 위해 잠시 미국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둥이를 임신했다는 걸 미국에서 알게 됐다. 미국에서 셋째를 낳고 키우다가 아예 미국에 정착하게 됐다”고 했다.

서향순이 자신이 운영하는 HSS스포츠아카데미에서 수강생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고 있다. HSS스포츠아카데미 홈페이지
서향순이 자신이 운영하는 HSS스포츠아카데미에서 수강생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고 있다. HSS스포츠아카데미 홈페이지


현재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HSS스포츠아카데미를 운영하며 활기찬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지역 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수강생이 많은 양궁 클럽이다.

처음부터 양궁장을 차리려고 한 건 아니다. 그런데 LA 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가 미국에 거주한다는 기사가 지역 신문에 실리면서 그에게 개인 교습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한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개인레슨으로 시작했던 양궁 교실이 점점 커지면서 그는 2011년 한국에 있던 햄버거 가게를 정리하고 정식으로 HSS스포츠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그는 “양궁이 집중력 강화에 좋은 운동이다. 현지 학부모들 중에 자녀를 우리 클럽에 보내고 싶어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따로 광고를 하지 않아도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수강생이 꽤 된다”고 말했다.

서향순의 막내 딸 캐서린 박(오른쪽)의 경기 모습. USC 2학년인 캐서린은 향후 LPGA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왼쪽은 LPGA 2부 투어에서 뛰었던 서향순의 첫째 딸 빅토리아 박이 캐디로 나선 모습. 서향순 제공


자녀들도 운동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엄마, 아빠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큰 딸 빅토리아 박(박성민)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2부 투어에서 뛰었던 유망주 골프 선수였다. 부상 등으로 운동을 그만둔 뒤엔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서 일하다 현재 HSS스포츠아카데미의 총 매니저를 맡고 있다. 아들 박성대는 야구선수 생활을 했다. SK 와이번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팔꿈치 부상으로 은퇴한 뒤 SSG의 해외 스카우트로 일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활을 쏘아 온 터라 가끔 리커브와 컴파운드 활을 지도하곤 한다.

그를 가장 빼닮은 건 미국에 건너올 때 뱃속에 있던 막내딸 캐서린 박(19·박성윤)이다.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 다니는 캐서린은 2학년임에도 학교 골프부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다. 중학생이던 2019년 미국주니어골프협회(AJGA) 박세리 주니어챔피언십에서 정상을 밟았던 그는 대회 우승 부상으로 그해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하나금융그룹 챔피언십 출전하기도 했다. 고3때는 US여자오픈 예선을 1등으로 통과했다.

캐서린의 이름이 미국 골프계에 크게 오르내린 건 올해 5월 열린 미국대학체육협회(NCAA) 여자 골프 챔피언십이었다. 이 대회의 주인공은 사상 처음 2연패를 차지한 LPGA투어의 샛별 로즈 장이었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로즈 장과 마지막까지 개인전 우승 경쟁을 펼친 선수가 바로 캐서린 박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같은 연습장에서 함께 훈련한 두 선수는 지금도 아주 친하게 지내는 사이다. 대회 중계 때 현장 캐스터는 캐서린을 소개하면서 양궁 레전드인 서향순의 이름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서향순(오른쪽)이 지난 달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시합에서 딸 캐서린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서향순 제공
서향순(오른쪽)이 지난 달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시합에서 딸 캐서린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서향순 제공


서향순은 종종 캐서린의 캐디백을 메기도 한다. 그는 “막내한테 ‘엄마 꿈은 LPGA투어 프로가 된 너를 따라다니면서 응원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며 웃었다.

실제로 서향순이 캐디로 나설 때 캐서린은 종종 좋은 성적을 거두곤 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서향순이 바람을 읽는 데 일가견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코스에서 바람이 불면 어떤 방향으로 쳐야 하는지 느낌이 딱 온다”며 “활을 쏘면서 바람 읽는 법을 몸으로 배웠다. 딸도 바람에 대해서는 나한테 꼭 물어보고 친다”고 말했다.

서향순은 마지막 꿈을 위해 꾸준히 체력 관리를 한다. 캐디를 하거나 갤러리로 따라 다니기 위해서 하루에 수천 보, 또는 수만 보를 걸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애프터스쿨 위주로 운영되는 HSS스포츠아카데미의 특성상 그는 오전 중에 주로 인근에 있는 낮은 산을 오른다. 그는 “일주일에 세 번은 피터스 캐년에 간다. 왕복 1시간 20분 거리를 가볍게 숨이 차도록 오르내린다”고 했다.

‘골프 맘’이긴 하지만 정작 그는 골프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는 “가끔 지인들과 필드에 나가긴 한다. 골프를 그만둔 첫째 딸과 라운드도 한다”며 “하지만 스코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골프 자체보다는 잔디를 걷는 게 목적이다. 오랫동안 건강하게 걸을 수 있어야 딸의 시합도 따라다닐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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