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 10년차가 고군분투 끝에 찾은 평생 일자리는…“내가 ‘정말로’ 즐길 수 있는 일”[서영아의 100세 카페]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25일 03시 00분


[이런 인생2막] 김학서 전 무역협회 상하이지부장

무방비로 맞이했던 정년후 10년
좌충우돌 고군분투 시기 거쳐
수필가, 독서모임 기획자로 정착
퇴직자들 경험과 지식 사장 안타까워
퇴직 후 삶은 스스로 만들어가야
나이 들어서도 재미있게 사는 법

퇴직후 근 10년이 흐른 요즘, 김학서 씨는 가장 열정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운영하는 독서모임의 활동을 엮은 책을 자랑하는 김학서 씨.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근 10년 전인 2014년 4월, 김학서(67) 씨는 32년간 다니던 한국무역협회에서 정년퇴직했다. 만 58세. 한 달 정도는 참 좋았다. 소파에서 딩굴며 세상을 다 가진 듯 속이 편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몸이 근질근질하고 좀이 쑤시면서 깨닫게 됐다. ‘퇴직 후에 뭐라도 배워 새롭게 일을 시작해야 하는구나….’

‘OECD 보건통계(2023)’에 따르면 0세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6세, 65세가 된 사람의 기대수명은 86.6세에 이른다. 반면 법정 퇴직연령은 60세, 민간기업의 비자발적 퇴직연령은 49.5세로, 퇴직 후 20~30년이 숙제처럼 남게 된다. “평생 어느때보다 재미있게 살고 있다”는 김 씨는 지난 10년간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13일 그가 운영하는 시니어 독서모임에 가봤다.

시니어들, ‘내 이야기’ 하면서 치유되고 자존감 높여
서울 강동구에 자리한 서울시민대학 동남권캠퍼스의 한 교실. 시니어 남녀 10명이 둥근 테이블 앞에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책 질문지로 토론하는 독서모임. 자신들은 ‘수다떨기 인생학교’라고도 부른다.

수다의 화두는 김학서 씨가 신작 수필집에서 뽑아온 9가지 질문. 예컨대 △싫은 사람 △밥벌이 △전원생활 △멍 때리기 △새로움과 마주할 용기 등이 이 날의 질문, 즉 화두다. 질문별로 참가자들은 돌아가며 이야기를 쏟아냈다. 화두가 다양하다보니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기억이나 경험들이 마구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김 씨는 2년 전 우연히 책 질문지 만드는 법을 배워 질문지 독서 모임 기획가로 활동하고 있다. 여러 책에서 발췌한 문장과 함께 던지는 질문이 사람들이 자연스레 얘기를 꺼내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13일 모인 독서모임 멤버들. 2년째 어김없이 매주 월요일 오전에 모인다. 질문지를 토대로 자유롭게 토론하고 나면 간단한 점심을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메뉴는 1만 원 정도의 한식이 많고 각자부담 원칙이라고. 1500원 짜리 커피값은 가끔 1만원씩 걷어 충당한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자신이 만들어온 교재를 읽으며 멤버들에게 대화의 실마리를 풀 질문을 던지는 김학서 씨.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내 사연이 소중하면 당신의 사연도 소중하다
“퇴직 후 동병상련의 시니어를 많이 만나면서 알게됐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누군가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럴 기회가 별로 없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자기 서사를 이야기하며 그 자체로 위로받고 치유된다는 것을요. 나이 든 세대는 하소연할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로 마음 치료가 되는 것같아요.”

구성원은 글쓰기나 독서에 관심이 많은 시니어들. 현재는 55세부터 78세까지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나면 뭔가 후련해지고 즐거워지는 것을 체험해본 사람들이다.

한 멤버는“10년 간 혼자 지내던 생활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러 나오는 과정 자체가 용기가 필요했다”면서 “이제는 매주 이 시간을 기다리게 됐다”고 말한다. 구성원은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 정책이라 조금씩 들고 나며 8~10명 규모로 2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다.

―혼자서만 길게 얘기한다던가, 물 흐리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요.

“자연스럽게 필터링이 되더라구요. 토론 때는 2분이상 발언금지, 다른 사람 얘기에 대한 논쟁 금지. 이런 원칙이 있어요. 지나칠 경우 제지를 하기도 하지요.”

각자의 소소한 사연은 자신에게는 소중하지만 타인에게는 관심을 끌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자리에서는 일종의 사회계약이 작동하는 느낌이었다. 타인의 얘기를 소중하게 들어주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퇴직후 5~6년은 경험과 지식 살려 사회활동
김학서 씨가 평생 몸담았던 무역협회는 중소무역업체의 수출입업무를 도와주는 기관. 그는 중국실장, 상하이지부장 등을 역임한 중국전문가다. 퇴직 후 우선은 이력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 찾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를 위해 창업컨설턴트 등 전문가 과정을 이수하기도 했다.

2012년 상하이지부장 시절 중국에서 열린 양국 IT기업 교류간담회에서. 김학서 씨 제공
2012년 상하이지부장 시절 중국에서 열린 양국 IT기업 교류간담회에서. 김학서 씨 제공
이듬해부터 2년간 광운대에서 겸임교수로 ‘중국 경제’를 강의했다. 2016년부터는 한국무역협회 수출전문위원으로 위촉돼 강원지역 중소기업의 수출 활동을 도왔고, 중소벤처기업 진흥공단, 대중소농어업 협력재단, 서울시 창업포럼 등에서 자문과 평가 업무에 참여했다.

“퇴직 후 5년 정도는 각종 기관과 단체에서 올리는 모집공고에 적극적으로 신청했습니다. 현직에서 익힌 경험과 지식, 노하우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사명감이 컸지요.”

―여러 일을 겸직하면 수입도 어느 정도 확보되나요?

“턱도 없죠. 교수는 한 과목 강사료가 전부이고 각종 위원의 경우 한달에 한번 회의 참석하고 교통비 받는 정도입니다. 퇴직 후에 돈 생각하면 즐겁게 일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인생을 즐긴다는 쪽으로 접근해야죠.”

―경제적으로 지장은 없나요.

“크게 문제 없어요. 평생 월급쟁이였으니 집 한 채에 국민연금, 개인연금 정도 있는데, 베이비붐 세대가 다 비슷할 거예요. 간혹 뉴스에 나오는 노후 부부 최저생활비(월 200~300만원)정도면 무리없이 살 수 있다고 봐요.”

그가 강원지역 수출자문위원으로일하던 2016년, 무역협회 강원지부는 중국의 유통회사 후이인그룹을 초청했다. 김학서 씨 제공
한국 업체의 베트남 전시회에 참가해 바이어 상담을 지원했다. 무역협회 강원지부 수출자문위원 시절이다. 김학서 씨 제공


100세 시대 무색한 시니어 일자리 사정
그에 따르면 이런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은 딱 65세까지다. 65세가 넘으면 아무리 경험이나 지식이 많아도 사회 활동을 중단하라는 공식적인 압력을 피부로 느낀다.

“국제노동기구(ILO) 통계가 만 64세까지를 생산활동인구에 넣기 때문일까요. 대부분의 일에서 아예 지원자격이 없어지더군요. 100세 시대가 무색하죠.”

사실 60세를 넘기면서 슬슬 사회에서 배제되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거리나 슈퍼마켓에서 흔히 마주치는 동년배들이 일터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회의가 있어 가보면 항상 제가 최고령자더군요. 외롭다는 생각을 넘어, 이걸 계속 나와야 하는지 고민이 되더라구요.”

―지자체 등에서 운영하는 ‘노인일자리’는 있을 텐데요.

“명목은 ‘일자리’지만 월 30만 원 짜리 돈 뿌리기예요. 그분들이 평생 쌓아온 경험이나 지식과는 무관한, 복지의 대상이 되는 거죠. 문제는 이걸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는 거예요.”

그러고보니 그가 가리킨 벽에 붙어 있는 서울시민대학의 ‘중장년 진로탐색 워크샵’ 포스터는 모집대상을 ‘40~64세 중장년 누구나’로 한정하고 있었다.

“65세 이상은 모든 울타리에서 벗어나 있어요.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는 거겠죠. 결국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던지 세력화해서 여론과 정치인들을 움직여야 고쳐질 겁니다. 전 그런 일을 시작하기엔 늦었지요.”

동년배들의 동병상련
그래도 한 20~30년은 더 뭔가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 스스로 길을 찾자. 그가 찾은 일은 두가지. 첫째는 수필가 등단이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게 100세 시대를 즐기는 길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문화센터에 등록하고 열심히 배워 지난해 1월 수필작가로 등단했습니다. 습작으로 쓴 글을 모아 ‘삶의 온도는 따뜻한가요’라는 수필집도 냈지요.”

이에 앞서 2020년에 퇴직 후 6년간의 생각을 정리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마이북하우스)’을, 이듬해에는 전자책 ‘중장년, 새 꿈을 펼치자(낙서당)’를 냈다.

그가 찾은 두 번째 일이 이날 보여준 질문지 독서모임이다.

“글쓰다 보면 혼자서는 재미있게 지낼 수 있어요. 그런데 동년배들이 눈에 밟히는 거예요. 우리 모임에 나오는 어르신이 78세인데 출석률이 제일 높아요. 말씀 들어보면 ‘이 나이 되니 불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모임 와서 얘기도 하고 또 연배가 아래인 사람들 얘기를 듣고 하면서 너무 즐겁다고 하세요.”

―시니어층 중에서도 특히 70대 남성들이 가장 갈 곳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경로당은 너무 이르고.

“그러니까요. 앞으로도 많은 시니어와 질문지 모임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조만간 이분들 이름이 공동으로 들어간 결과물을 만들 생각입니다. 종이책이나 전자책, 동영상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중국 근무시절 부인과 함께. 평소 사진을 잘 찍지 않아 부인의 휴대전화에 보관된 것을 얻었다고. 김학서 씨 제공
중국 근무시절 부인과 함께. 평소 사진을 잘 찍지 않아 부인의 휴대전화에 보관된 것을 얻었다고. 김학서 씨 제공


나만의 무기를 기르세요
―베이비붐 세대의 퇴직과 고령자층 진입이 순차적으로 이뤄지고 있죠. 이 분들, 살 길을 찾아 각자도생하거나 세상에서 한 발 빼고 조용히 방관자로 살거나 대충 두갈래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극소수 퇴직자들이 뭔가를 하려고 하고, 대부분은 그냥 인생을 놓고 살아요.”

―왜 그럴까요.

“무언가에 새롭게 도전한다는 생각을 쉽게 못하는 탓 같아요. 저는 그런 분들에게 ‘생산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늘 얘기해요. 소비자 입장에서 노래를 듣기만 할 게 아니라 노래건 뭐건 재미있으면 그걸 직접 하라는 거죠. 누구든지 뭔가를 한 2~3년 꾸준하게 붙들고 가면 밥벌이도 된다고 보거든요. 그러면 반응들이 ‘그 동안에는 뭘 먹고 사느냐’고 해요. 하지만 뭘 하든 간에 그 3년은 지나가요. 아무 것도 안하고 살면 그냥 지나가는 거고 뭔가를 하면 성과물이 조금씩은 쌓이는 거죠.”

―좀 더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가라는 말씀인가요.

“살면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잘 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지 못하면 남들이 차려주는 밥상이나 바라게 됩니다. ‘나 좋은 밥상 줘, 그럼 내가 먹을게’ 이런 생각이거든요. 모두가 다 그런 태도라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 스스로가 밥상 차릴 생각을 해야지요.”

그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만 4년간 무역협회 상하이지부장으로 근무했다. 퇴직 후 아들내외와 함께 상하이를 찾은 김학서 씨 부부. 김학서 씨 제공

나를 위해, 타인 위해 밥상 차리는 자세
그는 요즘 세상의 변화를 오픈카톡방에서 배운다고 했다.

“요즘 오픈카톡방 보면 작은 것은 100명 단위, 큰 것은 1200명 정도 가입돼 있는 것도 있어요. 저는 누구건 1000명 정도만 내 고객을 갖고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고 봐요. 그걸 가지고 사업을 한다면 모두 1인 기업이 되는 거죠. 사업도 옛날에는 조직에 의존해서 했다면 지금은 개인들이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것을 확실하게 갖고서 뭔가 챙기는 사람이 승자예요. 즐기면서 잘하는 사람이 가장 강할 수밖에 없고요. 앞으로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해야 해요.”

―무슨 말씀인지.

“퇴직하고 보니 더더욱 확실하게 알겠어요. 좋건 싫건 의무에 따라 일하는 월급쟁이는 하다 보면 끝내 그냥 월급쟁이죠. 이들은 별 고민도 안 해요.

그에 비해 1인기업들은 그게 자기 것이니까 고민을 하더라고요. 눈덩이로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잘 안 뭉쳐지는데 자신의 고민이라든가 생각을 거기다 자꾸 쏟아붓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눈덩이가 확 커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경제적인 부분도 자동으로 따라올 수 있을 거예요. 스타트업이나 유튜브 채널이나 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요.”

용기를 내는 것도 습관
“저는 지금도 무언가를 배우려고 애씁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을 공부하고 있어요. 두어달 전, 동영상 만들기 강의를 들으러 부천까지 갔어요. 8만 원 내고 8시간 수업을 듣는데 머리만 아팠죠. 하지만 어찌어찌 동영상을 만들 수 있게 됐어요. 용기를 내는 것도 습관이에요. 습관은 그 다음부터는 반복되기 때문에 쉽게 굴러가죠.”

그는 질문지 만들는 일이 너무 재미있고 그것을 동료들과 나누는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요즘 ‘평생 중 가장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뭐라도 좋으니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시작해보세요. 공을 들여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든 뒤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더욱 좋지요. 100세 인생 후반부 30~40년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 조금이라도 잘하는 것, 관심있는 것 중에 하나씩 붙들고 가면 뭔가를 이룰 수 있어요. 요즘은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조금만 도움을 받으면 전문가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

―다 좋은데 수필도 독서모임도 돈되는 일은 전혀 아니네요.

“지금은 그렇지요. 이것저것 용기를 내어 시도해보고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는 것,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이런 게 제겐 더 소중합니다. 또 누가 압니까. 하다보면 제게도 어떤 기회가 올지. 하하…”

김학서 씨는 요즘 인공지능 공부에 열심이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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