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차 직장인 김나라 씨(가명)는 최근 건강 악화로 휴직했다. 같은 부서 A 상사가 자신이 불성실하다며 모함하고, 사소한 일로 시비를 걸어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탓이다. 퇴근 10분 전 업무 지시로 야근하는 날도 많았다. A 상사의 괴롭힘은 몇 개월 전 자기 업무를 억지로 맡기려다 나라 씨가 이의를 제기하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웃는 얼굴로 윗선에 비위 맞추다가도 돌아서면 부하직원에게 고성을 지르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다. 휴직 뒤에도 A 상사는 “불성실한 직원 뒤치다꺼리하는 내가 피해자”라고 다른 직원들에게 주장하고, 나라 씨에게 “뭘 잘했다고 휴직하느냐”는 메시지를 보내는 등 여전히 나라 씨를 괴롭히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이코패스’라고 하면 끔찍한 연쇄살인마를 떠올린다. 2008년 개봉한 영화 ‘추격자’의 지영민(하정우) 같은 잔학무도한 이미지가 먼저 생각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모든 사이코패스가 범죄자란 생각은 완전 오해다. A 상사처럼 평범한 얼굴로 우리 곁에 살아가는 사이코패스 ‘성향’의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전과자도 아니고, 살인을 즐기지도 않는다. 다만 이런 성향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사이코패스 성향이란 매우 낮은 수준부터 중증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놀라운 건 사회에 잘 적응한 ‘성공적 사이코패스’ 성향인 이들은 조직에서 높은 자리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일반인 전체에서 사이코패스 비율은 1% 미만이지만, 기업 경영진에서는 4%로 크게 증가한다. 확률적으로 임원 25명 가운데 1명은 주변 사람에게 지독하게 구는 성향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목표를 위해 사람을 도구처럼 쓰며, 거짓말을 밥 먹듯 하거나 집요하게 누군가를 괴롭힌다. 고통은 그를 상사로 둔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다. 이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으며,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 방법은 없을까.
우리 곁에 살아가는 ‘사이코패스 성격’의 사람들
사실 사이코패스는 정식 진단명이 아니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DSM-5)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반사회성 인격장애’에 속한다. 반사회성 인격장애는 △반복적 범법 행위 △충동성 △기만(거짓말, 가명 사용) △분노·공격성 △무책임 △죄책감 결여 등이 특징이다.
사이코패스와 유사한 ‘소시오패스’도 반사회성 인격장애에 속한다. 소시오패스는 사이코패스와 성격이 상당히 비슷해 명확한 구분이 어렵다. 사이코패스는 뇌 결함 등 선천적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크고, 소시오패스는 양육 환경 등 후천적 영향이 크다. 일부 학자들은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보고, ‘사이코패스적 성격’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본 기사에서도 이들 특성을 아울러 사이코패스로 칭하기로 한다.
다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약간의 차이점은 있다. 이 둘은 ‘사이코패시 체크리스트(Psychopathy Checklist-Revised·PCL-R)’ 검사를 통해 가려낼 수 있다. 경찰청 프로파일러 출신인 서종한 영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를 이분법으로 나누기는 어려우나, 어떤 경향이 더 두드러지느냐의 차이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검사 항목 중 충동성이나 반사회성(폭력성) 항목이 두드러지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범죄형 사이코패스 성향으로 분류된다. 반면 반사회성은 낮으면서 인간관계나 감정 항목에서 사이코패스 점수가 두드러지면 ‘기업형’ 사이코패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후자가 소시오패스에 가깝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소시오패스는 사이코패스에 비해 폭력성이 덜 해, 일반인 중에 소시오패스 성향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직장으로 출근하는 ‘정장 입은 뱀’
세계적으로 쓰이는 사이코패스 검사인 ‘PCL-R’을 개발해 권위자로 꼽히는 로버트 헤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심리학과 교수는 직장에서 성공한 사이코패스를 ‘정장을 입은 뱀(snakes in suits)’이라고 칭한다. 차가운 뱀처럼 냉담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이용하는 특징을 표현한 것이다. 어쨌거나 이들은 범죄의 길로 빠지지 않고 어엿한 직장을 가진 ‘성공한 사이코패스’들이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명예교수는 “국내 사이코패스 연구는 범죄자에 국한돼 사이코패스는 전부 범죄자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며 “실제론 사회에 적응해 잘 사는 ‘성공적 사이코패스’가 적지 않다”고 했다.
●사이코패스 인격의 특성(PCL-R)
인간관계
달변가이며, 겉으로 봤을 땐 매력적 과대한 자기 가치관 병적인 허언 남을 속이고 조종함
감정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 결여 얄팍한 감정 냉담하고 공감 능력 결여 자기 행동에 책임지지 않음
생활방식
자극 추구 기생적 생활방식 현실적, 장기적 목표 결여 충동적 방만한 성행동
반사회성
자기 행동통제 못 함 유소년기 문제행동 다양한 범죄력 다수혼인 관계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그들이 직장 동료라면 특별히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많다. 헤어 교수가 조직심리학 전문가인 폴 바비악 박사와 함께 쓴 저서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에 따르면, 이들은 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호시탐탐 타인을 이용해 먹으려고 한다. 만만한 대상을 택해 약점을 빠르게 파악해서 가스라이팅하고 착취한다. 기껏 남이 작성한 계획안에 자기 이름을 슬쩍 바꿔치기하는 경우도 있다. 또 공감할 능력도 의지도 없기에, 폭언과 따돌림, 성희롱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죄책감 없이 거짓말을 잘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은 주변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준다. 능력을 실제보다 과장하기 위해 경력이나 실적을 대담하게 조작하는 경우도 있다. 크고 작은 공금횡령 문제도 불거진다. 손해 보는 것에 굉장히 예민해 누군가가 손해를 입혔다고 생각하면 아주 집요하게 복수한다.
문제는 이들의 특성 가운데 일부는 기업에서 선호하는 리더십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냉담함은 압박적 상황에서 불안이나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아 대담하고 강인해 보인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긴장 상황에서 심박수가 변하지 않고, 정서적으로 각성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나 도전적인 업무 앞에서 떨지 않고 침착하게 해낼 수 있다. 또 자아도취적이고 화려한 언변은 확신에 찬 리더처럼 보이게 한다. 실제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더라도 추상적 미래 비전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 공감 능력의 결여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결단력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내 주위엔 몇 명이나 있을까?
직장인 온라인 커뮤니티에 상사나 동료가 “사이코 같다”는 험담을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는 그가 정말로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기업 내 사이코패스를 연구하는 것은 협조를 얻기 쉽지 않아 전 세계적으로 연구가 많지 않은데, 그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헤어 교수, 바비악 박사와 크레이그 노이만 미 노스텍사스대 심리학과 교수는 미국 기업 7곳의 임원 203명을 대상으로 사이코패스 검사를 실시했다. 교차 평가를 위해 이들에 대한 동료 평가 3600여 건도 함께 진행했다.
그 결과 임원 203명 중 사이코패스 검사(40점 만점)에서 8명이 ‘확실한’ 사이코패스 점수(30점 이상)를 받았다. 이는 전체의 약 4%로, 임원 25명 중 1명꼴로 진짜 사이코패스라는 의미다. 일반인 사이코패스 비율(1%)에 비해 훨씬 높다. 참고로 감옥에 있는 미국 범죄자의 사이코패스 점수 평점은 남성 22점, 여성 19점이다. 동료 평가와 함께 따져봤더니, 이들은 책임감 없고, 성과가 부진하며, 팀워크가 안 좋았고, 조직 관리 능력도 떨어진다는 혹평을 받았다.
또 사이먼 크룸 미 샌디에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 연구에 의하면, 기업 고위 경영진의 12%가 사이코패스적 특징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앞선 연구와 편차가 크지만 적게는 25명 중 1명, 많게는 10명 중 1명일 수 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구팀은 “안타깝게도 기업의 의사 결정권자가 ‘미래의 리더’라고 누군가를 한 번 점찍으면, 아무리 동료 평가가 안 좋아도 결정을 흔들기 어려워 보인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이유로는 “사이코패스적 성격 특성을 리더십 특성으로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윗선에 인상 관리를 잘하고, 프레젠테이션을 잘하는 것이 그들이 조직에 해를 끼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준다고 판단하는 것일 수 있다.
“도발하지 말고 피하는 게 해결책”
사이코패스가 반드시 리더 자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이나 따돌림 30~40% 정도가 리더가 아닌 일반 직급에 속한 사이코패스에 의한 것이라는 결과도 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나, 위협이 되는 사람을 깎아내리기 위해 죄의식 없이 거짓말하고, 사람들을 조정하려는 특성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직장이나 어디서든 이런 사이코패스 성향의 사람을 만났다면 그들과 최대한 갈등에 휘말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교활한 이들과 싸우려다가는 오히려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다. 특히 이들은 경쟁자라고 인식하거나,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판단하면 누구든 찍어서 괴롭힐 수 있다. 이들에게 업무 성과를 빼앗기고 일방적으로 업무 평판을 훼손당하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은 팁을 참고해 보자.
우선 이런 동료들과 일할 땐, 업무 일정이나 지시 사항 등 기록을 꼼꼼하게 남기고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이들에게 위협적인 언행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나중에 거짓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업무 평가에 이를 활용해 열심히 방어해야 한다.
화가 난다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들과 ‘한판’ 뜨는 것은 좋지 않다. 이들을 도발하는 건 일종의 미끼를 무는 것과 마찬가지다. 폴 바비악 박사는 “부당하게 공격을 받는다 하더라도 항상 침착하고 냉정해야 한다”며 “이들과 직면해야 할 땐 공격성이 아닌 단호함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불평불만 하며 일을 손에서 놓아도 안 된다. 불성실한 직원이라는 평판을 퍼트릴 좋은 빌미를 주는 꼴이다. 화려한 언사에 휘말려 들지 않기 위해 대면이 아닌,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장 좋은 대처법은 부서를 옮기거나 회사를 떠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역시도 평판 조회를 위해 끝까지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서종한 교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에게 이용당해 피해자가 될 수 있기에 접촉 자체를 끊는 게 최선”이라며 “사이코패스 성향의 사람들은 결국 자기 탐욕을 채우기 위해 사람은 물론 횡령 등 조직에도 해를 입힐 수 있기에 조직에도 위험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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