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눈을 신경쓰지 않는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소소한 일거리, 혹은 공부로
세상과의 접점을 만들어야
노후 준비, 미리미리 차근차근
100세 카페는 2021년 1월 인터넷판으로 시작해 격주 토요판 신문과 일요일 인터넷판으로 독자들과 만나왔다. 저출산이 심각한 가운데 고령자가 급증하는 ‘정해진 미래’ 앞에서 국가와 사회, 개인의 준비는 미흡해보였다. 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돈 △건강 △행복의 3가지를 꼽고 젊어서부터 미리미리 준비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연재 만 3년이 돼 가는 지금도 이 취지는 변함이 없다. 올해에는 특히 인터뷰 성격의 ‘이런 인생2막’을 많이 썼다. 한바탕 현역시절을 거친 시니어들의 다양한 2막을 통해 독자들도 아이디어를 얻고 힘을 내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저물어가는 한해, 100세 카페를 빛낸 주인공들을 돌아본다.
“노년에도 일을 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
외국어고 교장 퇴직 후 개인택시 운전사로 일하는 정정호 씨(67)를 소개하며 가장 걱정했던 것은 ‘연금 받는 분이 굳이 돈을 번다’는 부정적 반응이었다. 정 씨도 같은 이유로 한 차례 만남을 사양했다가 한 달 뒤에야 인터뷰에 응했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예상대로였다. 여기 더해 생계를 위해 힘들게 일하는 다른 택시 운전사들이 느낄 위화감을 우려하거나 노년 운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내용들이 많았다. 정작 본인은 “충분히 예상했고 나 자신이 떳떳하니 전혀 문제없다”며 담담했다. 말 그대로 남의 눈보다 내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자세다.
신문기사가 나간 토요일부터 그의 휴대전화는 불이 났다고 한다. 인천의 교원 커뮤니티부터 학생들, 학부모들까지, 심지어 어릴 적 고향 철원시까지 들썩였다고 한다.
그를 통해 ‘과거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분명 그의 블로그에는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거의 없었는데, 기사에 사용할 옛날 사진들을 찾아 보여주는 장면에서 억눌러왔던 추억과 그리움이 생생히 전달돼왔다. 그의 기사에 뜨겁게 반응하는 분들도 오랜 교직생활에서 맺어진 인연들이 많았다.
정 씨는 교육자답게 기자에게도 많은 격려를 전해줬다. 인터넷판 기사가 나간 일요일 한산하던 그의 블로그에 하루 방문자가 2000명이 넘었다며 사진을 찍어 보내주고 자신에게 몰려오는 주변 반응과 격려들을 공유해줘 기사 쓰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소박하고 하찮은 일이라도 좋다
100세 카페에는 노년에 새로운 일거리에 푹 빠져 있는 분이 적잖게 등장했다. 대개 현역 시절보다 소박한 일거리다.
3년째 강원 춘천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박의서 전 안양대 교수(72)는 지역의 텃세를 살짝살짝 느끼면서도 시 소속 문화관광해설사 일에 열심이다.
월 100만 원 안짝으로 버는 정도지만 이 일이 없었다면 삶의 질이 달라졌을 거라고 말한다. 해설을 더 잘하기 위해 공부를 계속하고 개인적으로 책을 쓸 준비도 하고 있다.
은행 임원으로 퇴직한 뒤에도 개방형 공직에서 일하던 박삼령 씨(76)는 65세에 암이 발병한 이후 삶을 백팔십도 바꿔 산림치유지도사가 됐다. 경쟁이 치열해져 일할 기회가 줄고 있지만 하루 일을 얻기 위해 자비를 들여 지방에 답사를 다닐 정도로 진심이다.
10년 이상 부모님 간병을 하다가 아예 직접 요양원을 설립한 임수경 씨(62)는 본래 정보기술(IT) 전문가였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문을 연 요양원은 이제 궤도에 올라 설립 과정에서 진 막대한 빚을 조금씩 갚아나갈 수 있게 됐다. 부모님 편안하게 모실 수 있어 한시름 덜었고 고령자의 대열로 접어든 본인과 가족, 친구들을 위한 ‘갈 곳’을 장만했다는 점에서 흡족해한다.
그는 “부모님 세대는 우리가 부담하지만 우리 세대는 자녀에게 기댈 수 없다”며 ‘현타’를 안겨주기도 했다.
퇴직이라는 ‘현실’, 미리 준비해야
퇴직은 잘 준비하고 맞이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이후 삶에 천양지차가 난다.
정년퇴직을 향해 치밀하게 준비한 케이스로는 유통업체 부장급으로 정년퇴직한 다음 날 지식산업센터 관리소장으로 새출발한 최경묵 씨(62)가 있다.
전 직장에서는 만년 차장(퇴직 전 마지막 1년간만 부장이었다)으로 30년 가까이 일하며 자격증을 땄고 그것을 활용해 재직 중에도 경력을 쌓았다. 회사 입장에서는 그가 건물 안전관리자를 겸해주니 한 사람분 고용을 줄일 수 있었다. 그의 경우 직장에서 서러움을 겪었던지라 더 일찌감치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고 준비할 수 있었다.
반대로 적당히 따뜻하게 지낸 사람일수록 비바람 치는 광야에 던져졌을 때 충격이 크다.
신세계그룹에서 임원을 지냈지만 4년 전 만 50세에 퇴직해야 했던 정경아 전 상무(54)는 그 충격을 삭여 책을 두 권이나 썼다.
퇴직 2년 만인 2021년 낸 첫 책 ‘독한 언니의 직장생활백서’에서 그는 퇴직은 내색 않고 직장생활만을 다뤘는데, 그가 받은 충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퇴직 4년 차가 된 올해에야 자신의 퇴직을 정면으로 마주한 두 번째 책 ‘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일기’를 내놓았다. 그는 요즘 동아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는 한편 유튜브와 강연 등을 통해 새로운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인의 주된 직장에서의 비자발적 퇴직연령은 평균 49.5세. 어찌보면 정년퇴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받은 케이스다. 두 사람 사이 어디쯤에 해당하는 직장인이라면 회사를 떠날 날이 가까워질수록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새겨둬야 할 듯하다.
힘의 원천은 가족
시니어들에게도 가족은 힘의 원천이 된다.
초등학교 중퇴 학력을 극복하고 60세부터 경남 거제의 한의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이숙희 씨(64)에게 100세 카페 인터뷰는 세상에 자신을 커밍아웃하는 일이었다. 기사가 나간 뒤 모두의 이해와 인정을 받게 돼 여한이 없다며 기뻐했다.
11월 KBS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부군과 함께 서울 나들이를 하기도 했다. 늘 아내를 믿고 지원해주는 남편, 엄마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방향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딸까지, 가족은 이숙희 씨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빽’이다.
경기 평택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조동근 씨(63)도 먹고사는 문제에 쫓겨 중학교 중퇴로 끝날 뻔했던 경우다. 신혼 초기 중학교와 고교 검정시험에 합격하고 방송통신대에 입학했지만 20대 부인에게 닥친 병마에 다시 한번 위기가 몰려왔다.
기사에서 빼먹은 에피소드 하나. 부인이 비장암으로 암병동에 장기입원했던 당시, 병원 측은 병세를 체크하기 위해 환자의 피를 엄청나게 뽑아가곤 했다. 환자식만으로는 회복이 어려울 것을 걱정한 그는 병동 계단참에서 휴대용 가스버너로 보양식을 만들어 아내에게 먹였다.
병원 측에서 제지하자 “난 저 사람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며 저항해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2, 3일 뒤 그가 다시 요리를 시작하자 병원 측도 모른 척해버렸다고. 1980년대니까 가능했던 얘기지만 그는 이런 집념으로 가정과 부인을 지켜냈다.
30여 년 간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애썼던 재미작가 김석휘(74) 씨는 기사를 읽은 주변사람 덕에 미국 이민 초기 동고동락했다가 40년간 연락이 두절됐던 친구와 연결될 수 있었다. 다만 친구분이 알코올과 심장질환 탓에 인지 장애가 상당히 진행돼 소통은 어려웠다고. 그는 “나이들면서 후회되고 마음 아픈 기억들만 늘어난다”고 토로했다.
공부하는 노년이 아름답다
이순국 전 신호그룹 회장(81)은 출판사에서 신간 ‘다시 시작하는 인생수업’을 보내온 것이 계기가 돼 인터뷰를 청했다.
한때는 재계서열 25위를 넘볼 정도로 사업을 키웠지만 외환위기로 모든 것을 잃은 뒤 68세부터 건강을 부여잡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신체 개조를 단행하고 74세에 체육학 석사, 76세에 체육학 박사, 81세에는 의학박사(예방의학) 학위를 받으며 “뭔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신간에서 그는 홀로 죽음을 향해 노를 저어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표지에 그려놓고 있다. 지금도 매일 2시간씩 근력운동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서’라고 한다.
13년 째 방송통신대 학생 신분을 이어가는 김광성 씨(71)도 뒤늦게 알게 된 공부의 재미를 놓지 못하는 경우.
7년 전 재취업해 서울시내 감정평가법인의 상임고문, 그 자회사인 부동산중개법인의 대표를 맡아 현역 생활을 한다.
“방송대에서 젊은이들과 만나며 감각을 유지했기에 취업도 가능했다”며 학교에 공을 돌리는 그는, “이 나이에 공부는 지식이 아닌 지혜를 얻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대구의 환경미화원 정연홍 할머니(71)는 장난처럼 ‘책을 쓰겠다’는 말을 꺼냈다가 지난해 11월 첫 책 ‘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를 내면서 꿈을 이뤘다. 갑자기 듣게 된 ‘작가’ 호칭이 쑥스럽지만 행복하다고.
글을 잘 쓰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고 중요한 대목을 베껴 써보기도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뭔가를 쓰고 있다.
이웃과 함께, 동세대와 함께
정영록 전 서울대 교수(65)는 8월 말 학교를 정년퇴직했다. 5년 전부터 전남 구례로 거처를 옮기고 뜻 맞는 사람들과 귀촌타운을 만든다는 생각을 가다듬고 있다. 기성세대의 귀촌으로 지방소멸을 막고 질 높은 노후를 살아갈 터전을 만들자는 것.
3월에 인터뷰 기사가 나간 뒤 정부나 지자체, 개인들의 연락이 많았다. 정부에서 주관하는 지역활력타운 선정 심사에도 참여했는데, 이곳저곳 후보지를 돌면서 ‘쓴소리’를 쏟아냈다고 한다.
올 초 100세 카페를 장식한 김종훈(50) ‘우리동네좋은사람들’ 대표는 올해도 서울 강남구에서 ‘우리 동네와 함께 나이들기’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지역 어르신들의 주택에 낙상을 방지하기 위한 설비를 마련해주는 일에서부터 ‘살던 곳에서 나이들기(aging in place)’가 가능한 지역사회 만들기를 모색하고 있다.
나아가 이런 활동을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으로 18일 공유오피스에 책상 한개 놓고 작은 사회적기업 ‘쉘위파트너스’를 출범시켰다.
지난해 말 100세 카페에서 은퇴자들이 ‘갈 곳’에 대해 ‘공공에서 시설을 제공하고 민간이 운영주체가 되는 방식‘을 제안했던 백만기 위례인생학교 교장은 11월 ‘경기인생캠퍼스’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당시 기사를 본 경기도에서 그를 찾아갔고 경기도청 구청사에 장소를 만들고 운영을 그에게 위임하기로 했다는 것. 그로서는 분당, 위례에 이은 세 번째 인생학교다. 현재 25개 시범강좌가 운영중인데, 경기도는 앞으로 31개 시군에 인생학교를 보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백 씨의 평생 목표인 ‘전국에 인생학교 100개 만들기’가 현실감을 갖기 시작했다.
‘느리게 나이들기’ 연구하는 젊은 의사
지난해 4월 여러차례 취재했던 정희원(39)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 처음 만난 날 기자가 “당신은 반드시 스타가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예언한 인물이다. 젊지만 해박했고 유창한데 겸손하고 문제의식도 좋았다.
“아하하..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요, 책이나 좀 팔렸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하던 그의 표정이 개구장이 같았다.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그는 그 뒤로 책을 2권 더 냈고 신문에 정기칼럼을 쓰는가하면 각종 강연에 불려다니고 TV나 유튜브에도 자주 얼굴을 내민다.
취미인 호른을 열심히 연습해 ‘동아음악콩쿠르에 출전할 거’라 했는데 지난해 정말 ‘출전했고,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올해 두번째 신간인 ‘느리게 나이드는 습관(한빛라이프)’을 최근 보내왔다.
댓글에서 읽히는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
기자는 100세 카페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을 열심히 읽는 편이다. 우리 시대 시니어의 초상이 그려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좋은 기운도 얻을 수 있어서다.
때로는 실망스러울 때도 있다. 열심히 사는 노년을 소개하면 종종 ‘이제 됐으니 그만 쉬며 인생을 즐기시라’는 조언이 달리는데, 이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라고 본다. 30, 40대가 보람을 얻고 활력을 느끼고 싶다면 70, 80대 어르신도 보람과 활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노력이나 행복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읽히거나 과도한 피해의식이 전해져오기도하는데, 그만큼 ‘내 삶이 힘들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보였다.
특히 안정적으로 연금을 받는 직종에 대한 질시가 심한데, 아직 부실한 한국의 연금제도 탓도 있어 보인다. 국민연금이 도입된 1988년 이래 꾸준히 연금을 납부해온 세대가 본격적으로 수급자가 된다면 맞벌이라면 3~400만이 넘는 가정도 드물지 않게 된다. 반면 저출산으로 인한 생산인구 감소로 연금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실제로 노후를 살아본 분들의 공통된 증언은 나이가 들수록 생활비는 많이 들지 않는다는 것. 이때는 생계문제보다 남는 시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서 보람과 의미를 찾을 것인가가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이런 인생 2막’에 등장하는 분들을 어떻게 찾아내느냐고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 가장 많은 경우는 이메일을 통한 자천타천이다. 출판사에서 100세카페에 어울릴 것같은 신간을 보내주기도 한다(내돈내산인 경우가 더 많다).
재미있는 것은 한 기사가 나가면 유사한 분들의 소개가 몰려온다는 점. 예컨대 전직 교사가 주인공으로 나가면 교직에서 은퇴하신 분들의 메일이 갑자기 많아지고, 은퇴 후 전원살이하는 분 얘기가 나가면 전원에 정착한 분들이 전국에서 연락해오는 식이다. 이런 경우 아무래도 비슷한 사례를 연달아 다루기 어렵다보니 뒤로 돌려지게 된다.
이 밖에도 언급하지 못한 더 많은 분들을 인생2막이라는 주제로 만났다. 이들은 노년에도 사회와 사람, 세상과의 소통은 중요하다고 입 모아 말한다.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앞으로도 열심히 찾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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