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도 “네, 네”…나는 왜 거절을 못 할까?[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13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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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들을 메일(best@donga.com)로 알려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

하기 싫어도 “네” “괜찮아요” “좋아요”라며 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저런 일을 다 맡아서 하다 보면 남들은 다 쉬는 시간에 혼자 바쁘게 아등바등하기도 한다. 자책도 잠깐, 어느새 또 “네, 네”를 외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게티이미지뱅크
하기 싫어도 “네” “괜찮아요” “좋아요”라며 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저런 일을 다 맡아서 하다 보면 남들은 다 쉬는 시간에 혼자 바쁘게 아등바등하기도 한다. 자책도 잠깐, 어느새 또 “네, 네”를 외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게티이미지뱅크
직장인 이우진 씨(31·가명)는 아무리 바빠도 동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예스맨’으로 유명하다. 서류 검토 같은 간단한 부탁은 일상이고, 주말 출근 일정이 생기면 동료들은 우진 씨를 1순위로 찾는다. 미혼인 이 씨는 기혼 동료들이 주말에는 바쁠 것이라 여기며 기꺼이 부탁을 들어준다. 하지만 동료들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놀러 간 사진을 올릴 때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하는 자괴감에 빠진다. 그러면서도 거절했다가는 부탁하는 사람이 기분 상해할까봐, 혹은 회사에서 평판이 나빠질 것을 걱정한다.

대학생 박하늘 씨(20·가명)는 친구들과 약속이 끊이질 않는다. 친구 많은 ‘인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집에서 쉬고 싶은 날조차 “다음에 보자”고 거절하지 못해서 비롯된 일이다. 친구가 1시간 이상 떨어진 자신의 집 근처로 불러내도 군말 없이 나간다. 친구들과 있을 땐 대화의 맥이 끊길 것을 우려해 화장실을 가지 못할 때도 있다. 마음대로 행동했다 친구들이 자신을 싫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 씨나 박 씨처럼 주변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부탁을 거절하면 상대가 민망하고, 기분 나쁠 거라고 생각하는 ‘착한 사람’들이다. 부탁을 들어주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냥 “알겠다”고 하기 일쑤다. 때로는 ‘내가 조금 손해 보지 뭐’ 혹은 ‘오래 볼 사이니까’ ‘착한 게 좋은 거야’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한다.

배려심은 원활한 사회생활에 필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과도한 배려로 원치 않는 상황에 끌려다니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린다면 문제다. 이런 이들은 하기 싫은 남의 일은 꾸역꾸역 도와주면서, 정작 본인이 부탁할 일이 생기면 입을 떼기 어려워한다. 반복되는 ‘호의’가 자신을 ‘호구’로 여기게 하는 빌미가 될 수 있는데도 이들은 왜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먼저 걱정하고, 눈치 보는 걸까.

“거절당하면 마음 상해”…높은 ‘거부 민감성’
거절당해도 ‘타격감’이 별로 없는 사람도 있지만, 유난히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거절당하는 것도, 거절하기도 모두 어려워한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이 씨나 박 씨처럼 무리한 부탁에도 거절 못 하고 끙끙거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욕구를 자기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일이 다반사다. 심지어 다른 사람은 나에게 부탁할 권리가 있지만, 난 그걸 거절할 권리가 없다고 여기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사람들의 특징을 높은 ‘거부 민감성(rejection sensitivity)’에서 찾는다. 제럴딘 다우니 미국 컬럼비아대 심리학과 교수가 1990년대에 제안한 개념인데, 말 그대로 누군가에게 거부당할 때 민감하게 반응하는 수준을 의미한다. 거부 민감성이 높은 사람들은 거절당하거나, 비판받을 때 큰 수치심을 느끼며 자존감에 타격을 받는다.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도 거부 민감성이 높은 경우일 수 있다. 내가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싫어할 것이라고 믿는 식이다. 이런 이유에서 상대의 무리한 부탁에도 미움받지 않기 위해 “예스”로 대답한다. 사회적 관계에서 거부당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선제 조치이자 방어기제이다.

말끝마다 “미안, 미안”…공감 능력의 과잉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부탁을 한 상대방이 나에게 거절당하면 나만큼 상처받을 거라고 여긴다. 그래서 별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미안하다”거나 “죄송한데…”를 남발한다. 상대방의 실망감까지 미리 걱정해서 나오는 언어 습관이다. 공감 능력이 굉장히 뛰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요구를 들어주기 힘든 스스로를 향한 공감은 결여돼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이들은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남의 화를 돋우는 행동을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명백한 하자가 있는 불량상품을 구매한 뒤 환불받기 어려워하고,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가 이물질이 나오더라도 따지지 못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최대한 협조적이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걸 선호한다. 여기에 완벽주의 성향까지 더해지면 더 피곤한 삶을 살게 된다. ‘100% 착하지 않으면 못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의 저자이자 영국의 심리상담가인 재키 마슨은 이런 사람들에게 “상대방의 감정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거절당했을 때 불쾌할 상대방 마음을 미리 고려해 자신을 희생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는 책에서 “이런 생각을 가진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는 비도덕적 사이코패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상대방에 대한 과잉 공감 지수를 한두 눈금 정도만 내려보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관찰해보라”고 제안한다.

더 이상 ‘착한 아이’일 필요는 없다
다수의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거부 민감성은 성장기 애착 관계나 부모의 양육 태도와 큰 관련이 있다. 특히 ‘나는 뭔가 잘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조건부 사랑에 익숙한 환경에서 성장한 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부모나 조부모, 선생님 등 자신을 보살펴 주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일은 아이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다. 어른에게 외면받으면 아이는 스스로 살아남을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내가 착하게 행동하면, 어른들이 날 사랑해 줄 거야” 혹은 “혼내지 않을 거야” 같은 엄격한 내면의 규칙을 만들어 낸다. 만약 어른들이 화를 내면, 자기가 잘못한 탓으로 여기고 더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에게 착하게 행동해야만 관계가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 안에 여전히 ‘착한 아이’가 살고 있는건 아닌지 돌아보자.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다른 사람에게 착하게 행동해야만 관계가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 안에 여전히 ‘착한 아이’가 살고 있는건 아닌지 돌아보자.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인간중심 상담의 창시자 칼 로저스에 따르면, 착한 아이는 ‘평가의 소재(locus of evaluation)’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나(내부)’가 아닌, ‘다른 사람(외부)’에 있다는 의미이다. 평가의 소재가 외부에 있는 사람은 내 기준대로 사는 게 아니라, 남의 기준대로 산다. 내가 원하는 걸 하면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려 비난받는다고까지 생각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착한 아이는 성인이 돼서도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늦게까지 회사에서 야근을 하는 경우에 야근 이유가 자발적으로 업무 성과를 높이려는 것인지, 아니면 상사에게 칭찬받고 싶어서인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후자라면 마음속 착한 아이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아이의 생존전략이지, 성인의 생존전략은 아니다. 어렸을 땐 어른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과대평가 된 ‘거절 후폭풍’
이 씨나 박 씨 같은 이들은 거절하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매우 클 거라고 과대평가하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부탁을 거절하면 상대방이 “나를 싫어할 거야” “버릇없다고 생각할 거야” “다음부터 외면하면 어떡하지” 등과 같은 걱정에 사로 잡히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예측들은 대부분 과도한 불안이 만든 잘못된 생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해 미국심리학회지에 게재된 논문 ‘거절하는 사람은 거절로 인해 생기는 부정적 영향을 과대평가한다’에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논문에서 중국 연구진은 성인 2132명을 대상으로 총 7개 실험을 진행했는데, 각 실험 결과는 한결같았다. 부탁을 거절하는 사람은 그로 인해 자신에게 매우 안 좋은 결과가 생길 거라고 실제보다 부풀려 생각한다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문제에 대처하는 게 효율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불필요한 불안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심지어 부탁하는 사람은 당신이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부탁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부탁을 쉽게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도움을 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경향도 확인된다. 이는 부탁하는 사람과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 간 생각 차이가 꽤 크게 자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애초부터 큰 기대 없이 한 부탁에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전전긍긍한 걸지도 모른다.

선택적으로만 ‘좋은 사람’ 되기
이런 연구 결과 등을 놓고 볼 때 남의 부탁을 들어주는데 쓰는 에너지는 조금 줄이고 선택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들은 일상생활의 모든 관계가 너무 피곤해질 수 있다. 착한 아이는 가족, 친구, 연인 관계 등 다양한 관계에서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기 싫은 각종 모임에 나가고, 내 소관도 아닌 업무까지 떠맡는 식으로 무리한 부탁을 끊임없이 들어주다 보면 쉽게 피로해지고 불만은 쌓이게 마련이다. 이런 불만은 사소한 일에 치미는 분노나 어이없는 일에 터지는 짜증으로 분출되기 쉽다. 번아웃을 불러올 수도 있다. 프랑스 연구팀이 ‘성격과 개인차’라는 국제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에 따르면 거부 민감성이 높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번 아웃을 겪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프랑스 교사 627명을 2년 동안 추적 관찰했는데, 대인관계에서 거부 민감성이 높은 교사들은 다른 교사들보다 번아웃을 경험할 확률이 무려 119% 높았다.

내 삶의 주인공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다른 사람의 욕구나 감정에 함부로 우선순위를 주지 말자. 게티이미지뱅크
내 삶의 주인공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다른 사람의 욕구나 감정에 함부로 우선순위를 주지 말자. 게티이미지뱅크
따라서 내가 원할 때, 내 상황이 허락할 때에만 좋은 사람이 돼 주자는 원칙을 세우자. 재키 마슨의 “감정적 고통에는 서열이 없다”는 말도 기억해두자. 그는 “나보다 더 힘들다고 주장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선순위를 주지 말라”며 “내가 처한 상황은 아무것도 아니니 도와줘야 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고 강조했다. 어느덧 스멀스멀 올라오는 착한 아이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면 내 삶의 가장 우선순위는 ‘나’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자.

다음 주 기사에서는 ‘나는 거절당하는 게 왜 이렇게 두려울까’라는 주제를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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