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진료비를 깎아달라 한 까닭[이상곤의 실록한의학]〈144〉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25일 23시 21분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으로 불릴 만큼 몸이 허약했던 세종의 재위 13년 어느 날 일이었다. 사신을 따라 조선에 왔다 세종의 치료에 나섰던 명나라 태의의 진료비를 두고 군신 간에 언쟁이 벌어졌다. 승정원에서는 “지난번에 삼베 6필을 주었으니 이번에는 삼베 5필을 주자”고 결정한 반면, 세종은 “이번에는 진맥은 안 하고 약만 지었으니 삼베 2필만 주자”고 제안했다. 국왕으로서의 체면을 저버리고 푼돈마저 깎는 쩨쩨한 남자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혈세를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세종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조선 시대에 진맥은 병이 있음을 확인해 주는, 요즘으로 말하면 진단서의 기능까지 했다. 문종 때 이조판서 권맹손은 병가를 내고 목욕비용(휴가비)을 모두 받았는데 진맥도 받지 않고 꾀병으로 병가를 내 국고를 낭비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후 의원의 진맥 후 병이 확인되면 치료 날짜를 정해 병가를 주는 대안이 모색됐지만 “대신을 우대하지 않고 의심하며 의원만 믿는다”는 비난 속에 제도화되지는 않았다.

정조 때 어의 오도형은 임금을 단독으로 진료할 만큼 신뢰받는 명의였다. 정조 재위 4년 무렵, 자신감이 지나쳤는지 빈궁의 임신 사실을 진맥만으로 확진해 버렸다. 당시 승정원일기의 기사에 출산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미뤄 보면 오진의 가능성이 크다. 그 때문일까. 이후 의술에 관심이 많았던 정조는 의관들의 진맥을 잘 믿으려 하지 않았다. “대비의 맥이 지나치게 가라앉아 큰 병이 우려된다”는 의관들의 보고를 받고는 “평소 몸의 허실이나 체력을 고려하지 않고 일시적으로 나타난 진맥에만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반박한다.

동의보감은 맥을 이렇게 설명한다. 손목 부위에 맥이 있는데 부위에 따라 촌(寸), 관(關), 척(尺)의 세 자리로 나뉘고 누르는 힘에 따라 살짝 누르기, 중간쯤 누르기, 꾹 누르기 3가지가 있다. 모두 9개의 관찰 부위가 있어서 오장육부의 허실을 알아본다. 맥은 기혈에 앞서 나타나는 선천적인 하나의 기운이다. 미묘한 기운은 정신이 깨끗하고 기가 안정된 사람이 아니면 알아내지 못한다. 맥이란 말은 막(幕)이란 글자와 같은 뜻으로 맥을 짚는다는 행위는 결국 막 밖에 있는 사람이 막 안의 일을 알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다.

동서양 의학을 막론하고 진찰의 기록은 곧 질병의 역사다. 의료 차트(chart)를 ‘히스토리(history)’라고 부르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몸과 질병의 역사를 기록하는 게 의료 차트다. 맥을 짚는 행위는 여러 진단법 중 하나일 뿐 전부일 수는 없다. 한방의 진단법은 흔히 ‘망문문절(望問聞切)’이라고 표현되는데 보고, 묻고, 듣고, 손으로 만지면서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환자의 질병 정보를 알아낸다는 의미다. 진맥만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조선의 최장수 왕인 영조는 맥진(脈診)보다 문진(問診)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진료를 하지 않으려거든 말거니와, 하려면 반드시 상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근래 들어 몇몇 묻는 증세 외에는 내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으니 허다한 증상들을 의관들이 어찌 알겠는가?…(중략)…여러 증상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물어보고 잘 알아서 진료해야 할 것이다.”

진맥을 두고 가장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다. “맥 짚는 것을 배우는 자는 오직 힘이 있는지 없는지, 신기(神氣)가 있는지 없는지, 도수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는 데 그칠 뿐이다. 어찌 오장육부의 사정이나 수명과 성정을 능히 분별하리오.”

한의학을 너무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정약용 선생처럼 오직 진실하게 제대로 이용하는 것만이 정답이다.

#세종#진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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