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이탈 ‘의료 혼란’]
전공의 6415명 사직, 전체의 절반 넘어… 빅5 병원 30% 이탈
尹 “국민 볼모 집단행동 안돼… 의대 2000명 증원, 최소규모”
정부의 의대 증원에 항의하는 전국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절반 이상이 사직서를 내고 상당수가 20일부터 병원을 이탈하면서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의료공백이 현실화됐다. 응급실에서 발길을 돌리는 사례가 속출했고 수술도 절반가량만 진행되는 곳이 많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2000명 증원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규모”라며 정원 규모를 두고 타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20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날(19일) 오후 11시 기준으로 전국 주요 수련병원 95곳에서 전공의 6415명(55%)이 사직서를 냈고, 1630명은 근무지를 이탈한 것으로 집계됐다. 복지부는 이날 주요 병원을 현장 점검하고 근무 중단이 확인된 728명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내렸다.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의 근무지 이탈이 상대적으로 많았다”며 “업무개시명령에도 복귀하지 않을 경우 면허정지 등 행정처분 대상이 된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계속 복귀하지 않을 경우 검찰 고발도 추진할 방침이다.
복지부와 서울시 등에 따르면 20일 오전 6시부터 근무 거부를 예고했던 빅5 병원(서울대, 세브란스, 서울아산, 삼성서울, 서울성모병원) 전공의도 2745명 중 30% 안팎이 병원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 파업 당시 참여율(80%)보다는 낮은 수준이다. 다만 전문의 취득을 앞둔 4년 차 레지던트 등 병원에 남은 이들 중 상당수는 최소한의 진료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공의 모임인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는 이날 임시 대의원 총회를 마치고 “2000명 의대 증원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박단 대전협 회장은 “이번 사안은 1년 이상 갈 수 있다”며 장기화를 예고했다.
전공의가 빠져나간 대형병원은 수술실 가동을 절반가량으로 줄였다. 의료진이 부족한 탓에 응급진료를 거절당한 환자들도 생겼다. 60대 공모 씨는 이날 오전 폐암 4기 환자인 남편과 함께 서울대병원 응급실을 방문했다가 발길을 돌렸다. 공 씨는 “어제부터 남편이 42도 안팎의 고열에 시달려 집 주변 응급실에 찾아갔다가 ‘중환자는 치료할 수 없다’고 해서 대형병원으로 왔는데 또 거절당했다”며 의료진을 향해 “제발 받아 달라. 남편 같은 중환자는 이러다 정말 죽을 수 있다”고 호소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의료 현장의 주역인 전공의와 미래 의료의 주역인 의대생들이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볼모로 집단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또 “일각에선 2000명 증원이 과도하다며 허황한 음모론까지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숫자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강조했다.
환자 임모 씨(84)가 의식이 희미한 상태로 들것에 실린 채 들어왔다. 부인 서재희 씨(77)와 딸(50)이 황망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임 씨는 경기 구리시에 위치한 한 병원에서 구급차로 약 35km를 달려왔다고 했다.
임 씨는 지난주 낙상으로 고관절이 골절돼 병원에 입원했지만 후두암에 뇌경색, 심근경색 등 각종 기저질환이 있는 데다 고령의 중증환자여서 대형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딸은 “어제(19일) 저녁부터 서울대병원 등에 전화를 돌렸지만 모두 ‘전공의 사직 사태로 와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며 “오늘 아침 군병원 응급실에 민간인이 갈 수 있다는 뉴스를 보고 급하게 왔다”고 했다. 딸은 안도감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부인 서 씨는 “의사들이 사람 죽으라고 내버려 두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임 씨는 이르면 21일 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 군 병원 응급실 찾는 중증 환자들
전공의 상당수가 사직서를 내고 근무를 중단하면서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발길을 돌린 환자들은 20일부터 민간인에게 문을 연 전국 12개 국군병원과 공공병원을 찾았다. 정부는 비상진료체계의 일환으로 응급 환자를 위해 국군수도병원과 국군대전병원 등의 응급실을 동원했다.
이날 오후 1시 20분경 장폐색 증상을 보이던 A 씨(90)도 수도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석웅 국군수도병원장은 “지금까지도 응급환자의 경우 필요하면 군 병원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 출입 절차를 간소화해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며 “의료 공백 상황이 더 심각해질 경우 민간인 외래환자도 진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있다.
대형병원 응급실 중 상당수가 환자를 거부하면서 환자 전원(轉院·병원 이전)을 돕는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 상황실에도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19일 오후 5시 56분경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 상황실에는 인천에서 패혈증 증세를 보이던 환자의 전원(병원 이전) 요청이 접수됐다. 인천의 한 병원이 환자를 전원할 병원을 찾을 수 없자 상황실로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상황실에서 급히 병원을 수소문했지만 대형병원들은 인력부족 등을 이유로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이 환자는 약 25km 떨어진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이송됐다. 상황실을 총괄하는 응급의학 전문의는 “평소 패혈증 환자 전원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이번에는 1시간 넘게 걸려 겨우 이송했다”며 “대학병원 등 25곳에 전화를 걸었지만 헛수고였다. 지금은 다치면 안 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 환자 돌려보내는 응급실, 퇴원 창구는 북새통
응급실과 수술할 병원을 찾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거나 진료가 지연되는 환자들은 전국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다.
20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앞에서 기자와 만난 김영래 씨(86)는 “담석으로 18일 동안 입원했던 2차 병원에서 ‘큰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듣고 예약한 후 왔는데 입원을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2차 병원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역시 거절당해 남편(87)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날 오후 대전 중구에 있는 충남대병원 응급실을 막 빠져나온 염모 씨(50)는 “병원에서 투석을 해야 한다고 해놓고 필요한 시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없다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오전 10시 반경 아버지가 숨이 가빠져서 응급실에 왔는데 빈자리가 없다고 해서 2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수액을 맞았다”고 하소연했다.
반면 병원의 요청으로 퇴원 환자가 늘면서 퇴원 창구는 북새통을 이뤘다. 광주 동구 조선대병원 1층 퇴원 창구에서 만난 대학생 김모 씨(20)는 “전치 16주 골절상을 입고 수술한 지 1주일 만에 일단 퇴원하라고 해 병원을 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뚜렷하게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았다”며 답답해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이상헌 기자 dapaper@donga.com 이문수 기자 doorwater@donga.com 성남=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대전=김태영 기자 liv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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