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식욕부진’ 영조가 먹은 보약[이상곤의 실록한의학]〈145〉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22일 23시 30분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유학에서 좋은 위정자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방해 백성들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하는 인물이다. 이를 덕치라고 한다. 법치는 어쩔 수 없이 일이 불거지고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됐을 때 불가피하게 쓰는 사후 수단이자 차선의 방법이다. 그래서 덕치는 왕도(王道)이고 법치는 패도(霸道)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병을 치료하는 치료약보다 예방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보약 처방이 선호된 이유에도 ‘덕치’라는 유학적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약보다 음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세조 때 편찬한 ‘식료찬요’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음식은 으뜸이고 약물이 다음이다. 옛 선조들이 처방을 내리는데 먼저 음식으로 치료하고 안 되면 약으로 치료한다고 했다.”

조선의 한의학이 몸보다 마음의 안정을 강조하고 이를 위한 보약 처방까지 한 것 또한 유학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문인이자 학자인 홍귀달은 1472년 호남지역을 방문했다가 그만 병이 들었는데 친구로부터 ‘태화탕(太和湯)’이라는 처방을 받았다. 태화탕은 언제나 마음이 무사태평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인데, 퇴계 이황의 마음 건강 양생법인 활인심방(活人心方)의 핵심 ‘중화탕(中和湯)’이 바로 그것이다. 그 처방에 들어가는 약재들은 마음을 맑게 하는 청심(淸心), 욕심을 줄이는 과욕(寡慾), 만족할 줄 아는 지족(知足), 겸손하고 조화로운 겸화(謙和) 등 30가지 마음 수련법이다.

저질 체력의 대명사였던 영조가 83세의 천수를 누린 것도 이런 유학적 예방의학 덕택이었다. 평소 추위를 잘 타고 소화력이 약하며 늘 식욕부진에 시달렸던 영조는 입에 쓴 한약도 마다하지 않고 미리미리 먹어 체력을 비축했다. 영조는 20대 후반부터 피로감, 즉 한의학에서 노권(勞倦)이라고 말하는 증상으로 고생했는데, 더 큰 병을 막기 위해 스스로 보약을 챙긴 기록이 있을 정도다. “지금 상황에서 보건대 원기와 하초의 원기가 모두 매우 허약하니 조리하고 보충하는 처방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보중익기탕은 50첩에 한하여 복용해야겠으나 간간이 정지하여 100첩까지 복용하더라도 안 될 것은 없으니 우선 그 첩의 수량은 정하지 말고 올겨울에는 연속해서 팔미지황환과 겸하여 복용하겠다.”

권태감이나 피로감은 개인차가 큰 마음의 증상이지만 조선시대와 달리 현대에는 훨씬 다양한 원인이 존재한다. 당뇨병과 간질환, 신장질환 등 대사 이상과 약물의 장기 복용이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장시간에 걸친 노동이나 운동 등에서 비롯된 과로, 불안감, 불면, 의욕 저하를 유발하는 심리적 갈등이 가장 많다.

한의학에선 이들을 전신에 나타나는 증후에서 병적인 부분을 정리해 환자의 체력과 증상에 따라 네 종류로 분류하고 처방을 운용한다. 목소리에 힘이 없고 식욕이 부진하며 소화기 무력증을 동반하고 대변이 무르게 나오는 기허(氣虛), 안면이 창백하고 손발이 화끈거리며 피부가 건조하거나 가슴이 두근거리며 머리가 무거운 혈허(血虛),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불안이나 억울함, 초조함, 인·후두 이상, 복부 팽만감을 호소하는 울증(鬱症), 수분대사 이상으로 인한 두통, 현기증, 귀울림(이명), 메스꺼움, 설사, 부종, 위장 내 잔류감 등이 나타나는 담음(痰飮) 등이 그것이다.

한방에선 자신에게 맞는 약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진료이자 치료이다. 좋은 약이 좋은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약이 가장 좋은 효과를 보인다는 것은 한의학의 영원한 진리다.

#영조#한의학#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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