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수염으로 극심한 만성통증
가족과 고통없이 작별하고파
존엄사·안락사 합법화 국가 급증
국내 여론도 80% 이상 찬성
초고령사회 ‘탈출구’ 악용 막아야
한국에서 죽음의 자기결정권은 어디까지 인정될까.
현재로서는 2016년 제정돼 2018년부터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임종 단계에 연명치료를 받지 않는 것’까지다.
본인이 사전에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 놓거나 본인의 의식이 없다면 가족이 합의해 결정할 수 있다. 주로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현대의학의 힘을 빈 연명과정을 피할 수 있다. 단, 통증관리와 영양공급은 계속된다.
임종과정을 인위적으로 ‘늘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극적 안락사’라고도 불린다. 만약 임종 단계는 아닌 불치병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회복될 가망 없이 통증이 이어진다면?
죽음의 자기결정권 보장해달라
제주도에 사는 전직 공무원 이명식(63) 씨가 이런 경우다. 그는 원인을 알 수 없고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척수염’ 진단을 받고 5년째 하반신 마비와 극심한 환상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그가 지난해 12월 조력 존엄사를 입법하지 않은 현 상태는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청구의 내용은 1)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에 조력 존엄사를 허용하는 구체적 입법을 마련하지 않은 잘못에 대한 청구 2) 자살관여죄를 규정한 헌법 조항의 위헌여부에 대한 청구의 2가지.
존엄사를 원하는 당사자와 가족의 기본권이 침해되고 있는데도 국가가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 자기운명결정권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1월 16일 ‘심판회부’를 결정함으로써 조력 존엄사에 대한 헌법소원재판이 시작됐다. 심판회부는 정식으로 심판하겠다는 뜻인데, 2017년과 2018년에는 유사한 헌법소원 심판청구가 모두 각하됐었다.
<현행 연명의료 중단과 의사 조력 존엄사 개념 비교>
연명의료 중단
의사조력 존엄사
관련법
연명의료결정법으로 허용
법적 근거 없어 불허
조건
사망 임박, 회복 불능
극심한 고통, 회복 불능
이행수단
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등 연명의료 중단
사망을 유도하는 약물 처방
대상
의식불명 환자 포함
의식불명 환자 미포함
환상통 시달리는 척수염 환자
이명식 씨는 제주도에서 딸(36)과 함께 산다. 5년 전 명예퇴직 뒤 제주도에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그런데 피부과에서 알레르기 치료를 위한 주사를 맞고는 고열과 두통에 시달렸다. 며칠 뒤 대학병원 응급실에 갈 때쯤에는 ‘뇌 속을 면도날로 베어내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 뒤 40여 일 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처참했다. 가슴 아래가 마비됐고 척수염이란 진단이 어렵사리 내려졌다.
척수염은 척수 주변 신경섬유가 손상돼 신경통증, 마비, 감각 이상을 유발한다. 그의 경우 바이러스가 척수에 침투해 염증을 일으켰고 신경을 교란시키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병원 10여 군데를 돌았지만 원인도 모르고 치료에도 진척은 없었다.
“차라리 말기암 환자였다면…”
지난달 26일 전화 인터뷰에 응한 이명식 씨는 대상을 알 수 없는 피해의식과 분노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히는 건 견딜 수 없는 통증. 수시로 찾아오는 통증은 마약성 약물로도 제어가 되지 않는다.
“다리는 마비가 됐는데 고장난 신경이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통증을 만들어냅니다. 통증이 심하면 마구 화가 나요. 그런데 화낼 곳이 없고 화를 내는 내 모습도 추접해보이고….”
그의 표현에 따르면 다리를 프레스기로 압박하거나 꼬아서 꼬집는 듯한 느낌이 수시로 엄습해온다. 다리 아래는 차갑고 저려 난로불을 쬐고 있는데 머리쪽은 열이 몰려 땀을 뻘뻘 흘린다.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붙이고 지내며 오후에야 두어시간 정신을 차리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통증을 호소하면 병원에 입원하라고들 해요. 원내에서는 더 강한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뿐, 어느 병원이건 3개월 지나면 퇴원하라고 합니다.
차라리 말기암 환자였다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어요. 치료라도 할 수 있고, 치료가 안 되면 끝이라도 있으니. 끝없는 통증에 짓눌려 매일을 견뎌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디그니타스 등 해외 조력 단체 4군데에 등록
그의 딸이 수발을 도맡고 있다. 배변활동이 불가능한 아버지를 위해 매일 항문에 손을 집어넣어 변을 꺼내야 한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의 블로그에 남겨진 기록을 훑어보니 보통 사람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가득했다.
감각이 없으니 저온화상을 입어 발뒤꿈치와 새끼발가락을 잘라내거나 소변줄에서 일어난 감염 탓에 급성신우신염을 앓거나 욕창으로 고통받는 등 여기저기 몸은 부서져간다.
한시도 딸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만큼 딸에게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더욱 그를 괴롭힌다.
수차례 극단적 생각을 했지만 가족에게 흉한 모습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스위스에 ‘디그니타스’ 등 존엄사를 도와주는 단체가 있다는 걸 알고 한동안 희망을 품었지만, 결국 포기했다. 혼자 거동을 못하니 누군가 스위스까지 데려가줘야 하는데 형법상 자살방조죄가 된다.
이 씨가 한국존엄사협회 최다혜 회장에게 디그니타스에 대한 문의전화를 하면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료변론을 자처한 변호사단체 ‘착한법만드는사람들’과 연결됐고 그는 헌법소원에 나서기로 했다. 헌법소원에는 그의 딸도 청구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조력 존엄사 인정하는 국가 갈수록 늘어
의사의 도움으로 존엄한 죽음을 얻는 조력 존엄사 혹은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국가는 갈수록 늘고 있다.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캐나다, 뉴질랜드, 미국과 호주의 일부 주(州)들에서 조력사망을 허용하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의 유명배우 알랭 들롱(89)이 조력사망으로 생을 마감하겠다고 밝혔고 최근에는 네덜란드의 전 총리 부부가 93세를 일기로 함께 존엄사를 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2년 세계 처음으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네덜란드에선 △환자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치료의 가망이 없고 △죽고 싶다는 의지를 명확히 밝히는 등 6가지 기준이 충족될 경우 안락사를 시행하고 있다. 이렇게 안락사를 택한 사람이 2022년 8720명에 이른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미야시타 요이치의 저서 ‘안락사를 이루기까지(쇼가쿠칸)’에는 네덜란드인 시프 피텔스마 씨(2013년 11월 79세로 사망)의 그날이 소개돼 있다.
피텔스마 씨는 자녀와 손자 26명이 모인 거실에서 일일이 포옹과 키스를 나눈 뒤 아내가 불러주는 추억의 노래를 들으며 의사가 건네준 컵에 든 약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제 잠이 오네’라며 앉아있던 소파에 모로 누웠다.
그는 사망 13년 전 심근경색, 4년 전 피부암을 이겨냈지만 10개월 전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자 안락사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의 어머니가 오랜 기간 알츠하이머를 앓았는데 같은 길을 걷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굳었다.
이를 계기로 네덜란드에서는 치매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해당되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헌재 심판, 이번에는 다를까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는 “조력 존엄사의 전세계적 확산은 21세기 들어 일어난 현상”이라며 “워낙 확산세가 빨라 한국에서도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될 것같다”고 말했다.
이명식 씨의 소송대리인으로 공개변론을 맡은 김현 착한법만드는 사람들 대표(법무법인 세창 변호사)도 “이번 헌법심판은 과거와는 다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2009년 존엄사 허용 여부를 다룬 이른바 ‘김할머니 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이미 ‘존엄사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임을 인정한 바 있다.
다만 ‘이는 법학 의학만이 아니고 종교 윤리 철학까지 연결되는 중대한 문제이므로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존엄사 관련한 현행 법 외의 입법의무는 없다’고 결정했다.
김대표는 “그로부터 15년이 흐르면서 조력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성숙 단계에 도달했다”면서 “관련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80% 이상이 찬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앞서 2022년 국회에서 안규백 의원의 발의로 조력 존엄사법이 발의됐으나 진척이 없었다.
최다혜 존엄사협회 회장은 “죽음을 앞둔 환자가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헌법 가치를 수호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선진국가들과 달리 노년의 의료와 돌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한국에서 조력 존엄사가 시행된다면 ‘너무 쉬운 탈출구’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본인의 의지보다 사회의 압력, 가족의 바람 등에 떠밀려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 치료받고 돌봄받지 못해 고육책으로 존엄사를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야말로 비극이다.
최 회장은 “그래서 사회보장제도나 의료서비스 확대와 조력존엄사 합법화가 병행돼야 한다”고 말한다.
“죽을 권리 인정받은 순간, 살아갈 의지 생겨나”
이 씨는 요즘 조력 존엄사가 가능하도록 세상을 바꾸는데 힘을 보탠다는 일념으로 힘든 나날을 버티고 있다.
그에게 존엄사가 인정된다면 즉각 실행에 옮길 계획인지 물었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내 생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싶다는 거죠. 선택지를 하나 더 갖게 되면 그때 가봐야죠. 통증만 사라진다면….”
이는 일본에서 안락사 문제를 제기했던 작가 하시다 스가코 씨(2021년 작고)가 생전 인터뷰에서 말한 심경과도 같다. “선택의 권리가 내게 있음을 확인하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긍정이자 마지막까지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는 일”이라는 것.
스위스 디그니타스는 등록 조건이 무척 까다롭지만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회원이 된 뒤 안락사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3%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고로 장애를 입은 데다 잠시도 그치지 않는 통증을 얻은 한 젊은이는 가까스로 안락사 허가를 받아낸 뒤 오히려 자신의 상황을 긍정하고 장애인 올림픽 출전 준비를 시작했다.
선택권을 얻더라도 선택의 자유는 여전히 각자에게 있다. 굳이 낯선 스위스 땅까지 찾아가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가족의 축복과 인사를 받으며 아름답게 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오히려 살아갈 힘을 줄 수도 있다.
위의 책 ‘안락사를 이루기까지’에 등장한 사례. 말기암 환자였던 네덜란드인 윌 피서 씨(2012년 65세로 사망)는 세상을 뜨기로 정한 날 자택에서 가든파티를 열었다. 왁자지껄하게 파티가 무르익던 무렵, 그는 친지와 친구들에게 이런 인사를 남기고 의사와 가족이 기다리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럼 여러분, 저는 지금부터 침대로 가서 죽겠습니다. 끝까지 파티를 즐겨주세요. 감사합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