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 타이거즈의 ‘검빨 유니폼(검정색 하의+빨간색 상의)’이 상대 팀 선수들에겐 공포의 대상이던 때가 있었다. 특히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이 마운드를 지키던 1985년~1995년의 해태는 한국시리즈와 같은 큰 경기에선 더욱더 강한 팀이었다.
선동열을 앞세운 해태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시리즈 4연패를 달성했다. 1990년에도 정규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라 5연패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그해의 선동열로 말할 것 같으면 정규시즌 35경기에 등판해 22승 6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1.13을 기록했다. 190과 3분의 1이닝을 던지는 동안 삼진을 189개나 잡았다. 무엇보다 놀랍게도 그해 724명의 타자를 상대하면서 홈런은 단 1개만 허용했다.
하지만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반전이 일어난다. 0-0으로 팽팽하게 진행되던 5회초 무사 2루에서 선동열이 마운드에 올랐다. 타석에는 타율 0.220, 4홈런의 김용국(62)이 있었다. 볼카운트 1볼 2스트라이크로 몰린 상황에서 친 공은 평범한 1루수 방면 파울플라이. 그런데 이 공을 포수 장채근과 1루수 김성한이 서로 양보하다가 떨어뜨리고 말았다.
죽다 살아난 김용국은 5구째 빠른 공에 냅다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런데 방망이 중심에 제대로 맞은 타구는 쭉쭉 뻗어가더니 왼쪽 담장을 살짝 넘어가는 홈런이 됐다. 김용국은 9회에도 선동열을 상대로 2타점 적시타를 치며 이날 팀이 얻은 4타점을 모두 올렸다.
충격을 받은 선동열은 2차전에서 김용철에게 또 홈런을 허용하며 무너졌고, 삼성은 3전 전승으로 해태를 꺾었다. 김용국은 “돌이켜보면 타자로서 최고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천하의 선동열을 상대로 혼자 4타점을 올렸으니. 아마 그때가 포스트시즌에서 해태를 처음 깬 시리즈였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해태를 꺾은 기쁨도 잠시.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리던 삼성 앞에는 ‘신바람 LG’가 버티고 있었다.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은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LG에 4전 전패를 당했다.
여기서 다시 김용국의 말이다. “LG는 1990년과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는데 두 번 다 내가 지분이 좀 있다. 1990년에는 삼성 선수로 4전 전패를 당했고, 1994년에는 태평양 유니폼을 입고 4전 전패를 당했다. LG가 8번 이겼을 때 난 8번 졌다.”
따지고 보면 한국시리즈에서 그만큼 많이 패한 선수도 찾기 힘들다. 당시 2002년 첫 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 삼성은 한국시리즈에만 가면 이상하리만치 경기가 풀리지 않았고, 그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수 때 못 이룬 꿈은 지도자가 돼서 이뤘다. 삼성은 2002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2005년과 2006년에도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는데 그는 2006년 삼성 2군 코치로 재직하고 있었다. 삼성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시리즈 4연패를 하며 마침내 ‘왕조’를 이뤘다. 그는 1군 수비코치로 영광의 순간을 함께 했다.
선수 시절 그는 명3루수로 불렸지만 골든글러브와는 인연이 없었다. 뛰어난 수비 실력에 비해 타격이 약한 편이었고, 3루수 포지션에는 한대화를 비롯한 강타자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5년 당시 삼성 외국인 선수 나바로가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받았을 때 고국으로 돌아간 나바로를 대신해 대리 수상을 했다. 단상에 선 그는 “선수 생활 11년을 했는데 (아무 상도 못 받다가) 대리수상까지 하게 됐다”며 “꿈에 나바로가 나타났다. 나바로가 한국말을 못하고 나도 스페인어를 못하지만, 2년간 함께 하니까 대충은 알아듣겠더라. 첫째로 ‘기자 분들게 감사하고, 성적이 안 좋았는데 계속 기용해주신 류중일 감독님께 감사하다’고 전하더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야구가 잘 될 때건 안 될 때건 그는 항상 유쾌한 사람이었다. 바로 그 특유의 긍정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 미국프로야구에서 월급을 받는 코치가 됐다.
선수 은퇴 후 잠시 실업야구 현대 피닉스 코치로 일했던 그는 1997년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떠났다. 첫해 그는 밀워키 산하 루키리그 코치를 했다. 이듬해인 1998년에는 밀워키 산하 싱글A에서 수비 및 주루 코치를 맡았다.
연수 코치 신분이라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첫해엔 원정 경기 때 받는 밀 머니(식사비)가 고작이었다. 2년차엔 구단에서 6개월 치 아파트 렌트비를 지원해 준 게 다였다.
하지만 3년째 그는 구단과 정식으로 코치 계약을 했다. 아파트 렌트비 전액 지원에 연봉으로 3만 달러를 받았다. 지금이야 3만 달러가 큰돈이 아니지만 당시 마이너리그 코치로서는 상당히 좋은 조건이었다. 그는 “그대로 미국에 1, 2년 만 더 있었으면 마이너리그 팀 감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미국 코치 시절 그는 가운데 이름을 따서 “용(Yong)”이라고 불렸다. 성실함과 낙천성, 친화력과 유머 감각까지 고루 갖춘 ‘용 코치’는 선수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영어를 잘하진 못했지만 진심으로 이를 커버했다.
원정 경기를 가면 한참 어린 선수들과 함께 나이트클럽이나 식당을 다녔다. 배고픈 마이너리거들에게 맥주 한 병씩을 돌리며 소통하려 애썼다. 필드에서는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배팅볼을 던졌다. 구단으로서는 ‘용 코치’ 같은 사람을 구하기 힘들었다.
1999시즌이 끝난 뒤 그의 연봉은 3만 5000달러로 뛰었다. 1년에 두 번 한국을 오갈 수 있는 비행기 표도 구해주기로 했다. 원하면 시즌 막판 메이저리그 승격도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1999시즌 후 스카우트를 겸해 한국에 왔다가 LG 트윈스와 계약하게 된다. 그는 “미국 생활이 너무 재미있었다. 하지만 선수들과의 좋은 관계와 달리 주변 코치들에게서는 남모를 시기 질투를 받았다”며 “당시 LG 구단에서 손을 내밀어주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고 했다.
그렇게 프로야구 선수로 11년, 지도자로 19년 등 30년간 현장을 누볐던 그는 요즘엔 대구 경북지역의 민영방송사 TBC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말하는 것 좋아하고, 언변이 좋은 그로서는 ‘천직’과 같다.
그는 작년 하반기부터 단일팀 라디오 중계로 2200경기를 넘게 중계한 김대진 캐스터와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다. 대구를 연고로 하는 팀이자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았던 삼성의 정규시즌 전 경기 144경기를 모두 따라다니며 라디오 중계를 한다.
걸쭉한 대구 사투리를 섞어서 하는 그의 해설에 대해 많은 팬들이 ‘전설’이라고 평가한다. 여기서 전설은 ‘傳說’이 아닌 ‘전에 없던 해설’의 줄임말이다. 대구 경북 지역이 아니더라도 애플리케이션 ‘티팟’을 다운받거나 유튜브 생중계를 통하면 어디에서나 ‘전설’의 해설을 들을 수 있다. 김용국 해설위원은 “편파 중계는 아니다. 다만 삼성을 중심으로 한 ‘편애 중계’인 것은 맞다”라며 “야구 좀 아는 아재와 함께 맥주 한 잔 마신다는 기분으로 들어주시면 된다. 브라질이나 미국 하와이 등 외국 청취자가 많아서 놀랐다”며 웃었다.
당초 KT 수석코치를 마친 뒤 해설위원 제의를 받았지만 하필이면 성대 쪽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느라 해설 데뷔가 늦어졌다. 대신 경주고 감독으로 2년간 후학을 지도했고, 2021년부터는 경기도 야구협회 감독관으로 활동하며 초·중·고와 대학야구, 그리고 독립리그 현장을 누볐다. 작년엔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7개팀) 선수들로 구성한 독립리그 대표팀의 코치로 일본에도 다녀왔다.
원래부터 건강 체질에 낙천적인 성격까지 갖춘 그이지만 성대 수술 후엔 건강에 더 신경을 쓴다. 무엇보다 수십 년간 피워왔던 담배를 단번에 끊었다. 그는 “마음을 먹자 금연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1년에 200만 원 이상 아꼈다고 좋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운동도 틈틈이 한다. 따로 시간을 내 피트니스센터를 찾기보다는 양치를 하면서 스쾃을 하거나 TV를 보면서 런지 동작을 하는 식이다.
그가 가장 추천하는 운동은 대표적인 맨몸운동 중 하나인 팔굽혀펴기다. 그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틈이 나면 팔굽혀펴기를 한다. 한 번에 20개 씩, 하루에 100개 내외를 한다.
그런데 팔굽혀펴기 개수를 세는 방식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대개는 팔을 굽혔다 올라올 때 숫자를 세지만 그는 내려갈 때 숫자를 센다. 그는 “팔을 뻗은 상태에서 버티고 있는 게 사실 크게 운동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팔을 굽히고 있는 상태에서 버티는 건 운동 효과가 좋다”며 “평생 이런 방식으로 팔굽혀펴기를 하다 보니 어깨가 전혀 아프지 않다. 지금도 여전히 배팅볼을 던질 수 있는 어깨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해설을 하는 틈틈이 대구에 있는 모교를 찾아 재능기부를 한다. 프로야구 선수로 뛰었던 두 아들(동영, 동빈)이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차린 야구 레슨장에서 배팅볼을 던지기도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내가 좋아하는 야구를 시작해 지금까지 야구를 할 수 있으니 너무 행복한 인생”이라며 “지금 하는 해설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야구의 재미를 느끼고 싶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미래의 나도 언제나 야구와 함께 하고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