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추진하는 의대 2000명 증원은 의학교육을 무너뜨리고, 필수의료 및 지역의료를 떠받칠 역량을 갖춘 의사 양성에 돌이키지 못할 손상을 주기 때문에 공공복리를 오히려 해치는 상황을 초래할 것입니다.”
최근 의학 석학들의 모임인 대한민국의학한림원이 제출한 의견서다. 필자 역시 의료계에서 의대 증원 관련 얘기를 많이 들어 걱정이 많다.
23일 열린 ‘대한민국 의료 이용의 문제점과 해법’이라는 미디어포럼에서 발표를 맡은 박종훈 전 고려대 안암병원장은 “문재인 정부 때 의대 증원 문제로 거리에 나와 쓴 경험을 했던 당시 의대 3, 4학년 학생들이 지금의 전공의(인턴, 레지던트)들이다. 이들은 와해된 상태여서 누구도 컨트롤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보건복지부가 아무리 완강하게 나서도 전공의들이 돌아오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본격적인 의료대란은 이제부터 나타날 수 있다고 걱정하는 의대 교수도 많다. 그동안은 일말의 기대감 때문에 대학병원에서 과중한 업무를 참으며 진료를 해 왔지만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정부로 인해 이젠 그런 기대감조차 없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응급실을 지키는 전문의들은 이미 낮 시간 근무 인력이 절반 이상 줄어든 상황에서 전공의까지 안 돌아온다면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부가 브리핑 때마다 “전공의 없이도 큰 문제 없이 잘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과 현장의 온도 차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29일 열린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 미디어 아카데미에서 김인병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은 의정 갈등이 더 길어질 경우 조만간 상황이 임계치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 이사장은 “올 3월 ‘응급실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상황이 오래갈 줄은 몰랐다”며 “이제는 ‘응급실 그만두겠다’는 성명 하나만 남은 상황이다. 그만큼 절박하게 막바지에 몰려 있다”고 말했다.
의대 교수들이 대학병원을 떠나 개원에 나서는 움직임도 본격화되고 있다. 경기 지역의 한 대학병원에선 이비인후과 신경과 교수 등 총 4명이 동시에 사직했다. 신경외과 교수도 곧 사직할 예정이라고 한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이비인후과 및 비뇨기과 의사도 개원을 준비하고 있다. 유명 대학 의대 교수들이 줄지어 떠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난해도 서울아산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 12명이 집단 사직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저수익, 고위험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정부에 대한 깊은 실망이 배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료의 사직을 지켜본 한 의대 교수는 “전공의가 없는 상황에서 일이 젊은 전문의에게 몰리고 있다. 힘들게 전공의를 마쳤는데 또 같은 일을 해야 하니 나가기로 한 것 같더라”며 “지금 개원해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이유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정부 방침대로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려서 필수의료가 살아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고 본 의사들이 향후 의료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사직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환자들의 피해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미 늦었지만 어떻게 해서든 전공의들이 복귀할 명분을 줘야 한다. 정부가 더 이상 시간을 끌기보다 의사 면허정지 행정처분 취소든, 사직서 수리든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내년도 의대 증원이 확정됐다고 정부가 한숨을 돌리기엔 상황이 녹록지 않다.
지금도 많은 대형병원 의사들은 ‘조만간 의정 갈등이 풀리지 않을까’ 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참고 있다. 의료 파국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도 정부의 책임이다. 6월 의료대란이 현실이 될까 봐 두려운 한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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