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늘어난 대(大)상속시대
부모 집, 자산 아닌 부채로 남아
노후주택 안 팔리고 세금 경비만
상속 포기 늘고 빈집 증가
상속받을 사람 없어 ‘국가 귀속’ 폭증
“보람 있는 곳에…” 유증 기부도↑
초고령사회 일본에서 사망자가 늘면서 ‘다사(多死)사회’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연평균 130만 명대이던 사망자 수는 지난해 157만 명으로 늘었고, 2040년 167만~168만 명으로 정점을 찍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벌써부터 장례를 치르려 해도 화장장이 모자라 1, 2주 기다리는 게 예삿일이 되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망자가 늘면서 상속도 늘었다. 특히 고도 경제성장기에 부를 축적한 고령자들의 사망으로 연간 약 50조 엔(약 460조 원)의 유산이 계승되는 ‘대상속시대’가 문을 열었다는 표현도 등장했다.
다만 상속을 받는 입장에선 부동산 자산이 마이너스로 작동하는 일이 늘어 유족 간 다툼으로 이어지고 있다. 집값이 떨어지고 팔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가정재판소의 상속 관련 상담은 연간 약 18만 건으로 10년 전과 비교해 2배로 늘었다.
상속이 부채를 부르는 시대
전쟁이 끝난 뒤 베이비붐 세대가 등장하는 건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일본에서는 3년간 800만 명 넘게 태어난 단카이 세대(1947~1949년생)가 여기에 해당한다. 미국(1946~1965년생)이나 한국(1955~1974년생)의 베이비붐 세대보다 기간이 압축돼 있지만 일본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집단으로 일컬어진다.
이들은 고도 경제성장기에 20, 30대를 보내고 버블경제기에 40대를 보내며 부를 쌓았다. 또 단카이 주니어 세대(1970~1974년생)를 낳으며 2차 베이비붐을 만들어냈다.
2023년판 일본 고령사회백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자의 자가 보유율은 87.4%에 이른다. 75.6%가 단독주택, 11.8%는 맨션을 보유하고 있다.
2030년이면 단카이 세대가 모두 80세를 넘어서고 단카이 주니어들은 60대를 바라보게 된다. 앞으로 수백만 가구의 상속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를 일본 언론은 ‘절망의 상속’이라 부르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부동산 가격의 하락 추세에 있다. 도쿄나 오사카 등 대도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일본의 부동산 가격은 전반적으로 하락세다. 인구는 2008년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지만 신규 주택은 지속적으로 공급되면서 주택 공급이 넘치는 미스매치가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앞으로 단카이 세대가 살던 낡은 주택 수백만 채가 그들의 사망과 함께 남겨진다.
부(負)동산의 악순환
한번 인구 감소가 시작된 지역은 사회 기반시설이 낙후되고 산업은 쇠퇴한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재개발도 멈춘다. 그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다시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단독주택인 양친의 집을 상속받아도 이미 60대를 바라보는 자녀 세대는 도시 지역에 주택을 소유한 경우가 많다.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관리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재산세나 유지비를 매년 내야 하고 붕괴나 화재 등 안전 관리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건물을 방치하면 급격히 훼손돼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거나 팔기도 어렵다.
그러니 상속을 받았다면 가급적 빨리 팔아야 하고, 그게 어렵다면 철거해야 한다. 문제는 일본에서 지은 지 수십 년 넘은 주택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집을 철거하려 들면 수백만 엔의 비용이 발생하고 세금 부담도 늘어난다.
일본 전국에 버림받은 빈집이 증가하는 이유다. 2023년 기준 전국 빈집은 900만 채. 방치된 가옥이나 토지에 대한 대책 마련에 행정기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5년부터 ‘빈집 대책 특별조치법’을 시행했다.
본래 주택이 세워진 토지는 나대지의 6분의 1만 재산세를 내면 되지만 지방자치단체가 ‘관리가 필요한 특정 빈집’으로 지정하면 나대지에 준해 세금을 매기겠다는 것이 골자다. 제대로 관리하거나 철거하라는 압박이다.
빈집 문제는 단독주택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서 ‘분양 맨션’이라 부르는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고도 경제성장기에 지어져 50년이 넘은 ‘한계 맨션’이 도시 지역에도 나타나고 있다. 도심에서 1시간 통근 거리인 뉴타운 주변에서도 빈집 예비군들이 적잖다.
상속 포기 늘고 빈집 폭증
그래서인지 상속 포기를 택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다. 사법통계에 따르면 일본에서 상속 포기 건수는 2019년 22만5000여 건에서 2022년 26만여 건으로 늘었다. 상속 포기를 하면 부동산뿐 아니라 현금이나 보험금 등 다른 자산도 포기해야 하지만 매년 증가하고 있다.
부동산 상속으로 손해를 보는 사례가 늘면서 불필요한 자산을 서로 떠넘기려는 가족 간 싸움도 우려된다. 유족들이 모두 “저금은 받겠지만 집은 필요 없다”고 나선다면 뭔가를 받겠다고 싸우는 것 이상의 진흙탕 싸움이 될 수 있다.
상속 포기나 떠넘기기가 계속되면서 ‘소유자 불명’이 돼 버린 골칫덩이 부동산도 전국에 늘고 있다. 이런 부동산은 행정기관도, 가족도 손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사(死)유지’라 불린다. 예컨대 100여 년간 등기가 이뤄지지 않은 채 폐허가 됐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건물들이다. 일본 언론에는 이런 사례가 심심찮게 보도된다.
인지장애(치매)가 오면 자산은 잠긴다
설상가상으로 고령자에게 찾아오는 인지장애(치매)라는 복병이 있다. 2022년 미쓰이스미토모 신탁은행에 따르면 일본의 인지장애 고령자가 보유한 자산 총액은 2020년 기준 약 250조 엔(약 2300조 원)이고, 2040년이면 345조 엔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같은 기간 부동산은 80조 엔에서 108조 엔으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됐다.
‘치매 걸린 부모님 집’은 일본에서 주간지나 책자의 주요 테마다. 고령의 부모님은 치매가 찾아오면 당연한 수순처럼 요양원에 입소한다. 이후 거처하던 집은 자연스레 빈집으로 남는다. 일본 다이이치 생명보험 경제연구소의 추정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방치된 치매 고령자의 집이 2021년 기준 약 221만 채이고, 2040년에는 280만 채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되나 법적으로 아무도 손댈 수가 없다.
일본에서 치매 환자는 상거래나 법률 행위를 할 수 없어서다. 일본 정부는 늘어나는 치매 환자의 재산 보호를 위해 2020년 민법을 개정해 ‘의사능력이 없을 때 그 법률 행위는 무효로 한다’고 정리했다. 치매 노인과 부동산 매매 계약을 했더라도 그가 치매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계약은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가족이 대신 팔기도 어렵다. 설사 본인이 동의하더라도 치매 진단이 내려진 경우 부동산회사나 행정기관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2008년 범죄수익 이전 방지법도 시행돼 부동산 매각 시 본인 확인이나 의사 확인이 엄격하게 시행된다.
치매 판정을 받은 노인의 은행 계좌가 동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경우 돈 많은 부모의 요양원비나 간병비를 가난한 자녀가 대신 내는 상황이 벌어진다. 금융기관들은 치매 판정을 받기 전에 임의후견인을 정해 놓거나 가족신탁을 해둘 것을 권한다.
치매 판정을 받은 뒤에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가정법원이 지정하는 법정후견인 제도가 있는데, 매달 수수료를 내야 하고 타인의 관리를 받아야만 한다.
“보람된 일 하는 곳에…” 기부 유언 늘어
자녀나 부모 등 상속받을 사람이 없어 국고로 귀속된 상속 재산도 2022년 기준 768억 엔(약 7000억 원)으로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최근 9년 새 2배 이상 늘었다.
이런 가운데 재산을 자신의 사후 가족이 아니라 사회공헌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NPO) 등에 양도하는 ‘유증 기부’도 늘고 있다. NHK는 유증 기부 총액이 연간 400억 엔 가까이로 늘었다고 올 2월 보도했다. 이런 기부액이 지난해 일어난 노토반도 지진 피해 지원 현장이나 난치병 연구 등에 활용된다.
보도에 따르면 유증 기부가 활성화된 배경에는 독신이나 무자녀 등 가족 형태의 변화와 망자의 재산을 반드시 가족이 받지 않아도 된다는 가족관의 변화가 있다.
자녀도, 가족도 없다는 한 80대 여성이 대표적이다. 그는 “내가 남긴 돈을 국가가 가져가서 쓰는 건 싫다”며 개발도상국에 교육 지원을 하는 단체에 살던 집을 포함한 모든 유산을 기부하겠다는 유언 공증을 남겼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았다는 70대 할머니는 아들의 권유로 동네 결식아동을 위한 ‘어린이식당’에 자신의 저금 30만 엔을 기부하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한 뒤 뿌듯해한 것으로 소개됐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