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국제고, 고시엔 첫 우승… “동해바다” 한국어 교가로 피날레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8월 24일 01시 40분


[한국계高 고시엔 우승 ‘기적’]
결승서 연장 접전끝 2-1 승리… 응원석선 눈물 흘리며 부둥켜 안아
은행원 출신 감독 “여기까지 올줄 몰라”… 축제 분위기 교토시, 호외 발행도

23일 일본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제106회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고시엔)에서 한국계 학교인 교토국제고 선수들이 우승을 확정 지은 뒤 마운드에서 환호하고 있다. 교토국제고는 연장 승부치기 끝에 간토다이이치고교를 2-1로 꺾고 한국계 학교로는 처음 고시엔 정상에 올랐다. 아사히신문 제공
23일 일본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제106회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고시엔)에서 한국계 학교인 교토국제고 선수들이 우승을 확정 지은 뒤 마운드에서 환호하고 있다. 교토국제고는 연장 승부치기 끝에 간토다이이치고교를 2-1로 꺾고 한국계 학교로는 처음 고시엔 정상에 올랐다. 아사히신문 제공

연장 10회말 2사 만루. 안타 하나면 승부가 뒤집히는 위기. 교토국제고 마무리 투수 니시무라 잇키(西村一毅)가 헛스윙 삼진으로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다. 34도 폭염보다 뜨거운 열기로 열띤 응원을 보내던 교토국제고 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한 재일교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를 외쳤다.

23일 일본 니시노미야시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제106회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고시엔)에서 재일 한국계 민족학교 교토국제고가 대망의 우승기를 품었다. 이날 결승에서 교토국제고는 동도쿄 대표인 간토다이이치 고교를 연장 10회 2-1로 꺾었다.

경기가 끝난 뒤 한국어 교가가 경기장에 나왔다.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大和·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가사에 맞춰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재학생과 졸업생·학부모·재일교포는 물론 응원에 힘을 보탠 교토의 다른 학교 학생들까지 우렁차게 교가를 불렀다. 이 장면은 NHK방송으로 전국에 생중계되며 올해 고시엔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우승기를 거머쥔 교토국제고를 두고 일본에서는 이변을 넘어 기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 160명 초미니 민족학교, 2500명 학교를 꺾다

우승이 결정되자 3루 응원석에서 교토국제고 재학생들이 기뻐하고 있다. 니시노미야=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우승이 결정되자 3루 응원석에서 교토국제고 재학생들이 기뻐하고 있다. 니시노미야=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하루라도 더 오래 함께 야구하고 싶다고 선수들에게 말해 왔지만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아저씨가 멋진 여름방학을 보낼 수 있게 해줘 고맙습니다.”

팀을 우승으로 이끈 은행원 출신 고마키 노리쓰구(小牧憲繼) 감독은 우승 소감을 묻자 선수들에게 영광을 돌렸다. 고마키 감독은 야구 선수로 간사이대를 나와 지역 은행에서 일하던 은행원 출신이다. 교토 한국 중학교 출신 고교 동기 소개로 주말에 야구를 가르치며 교토국제고와 인연을 맺었다. 24세에 은행을 그만두고 코치로 시작해 2008년 감독을 맡았다. 지금은 일본인 선수가 대부분이지만, 문화가 다른 한국 출신 선수들을 가르치며 소통의 중요성을 배웠다.

교토국제고는 1947년 재일동포들이 민족 교육을 위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세운 교토 조선중학교가 뿌리다. 이후 한국 정부 인가를 받아 교토 한국 중·고교로 재편됐다. 민족 교육을 한다는 자부심은 컸지만 형편은 좋지 않았다. 새로운 한국인 이주자 유입이 적고 기업 주재원, 외교관 등도 거의 없어 학교는 정원을 채우기도 버거웠다.

명맥이 끊길 위기에 학교는 변화에 나섰다. 2003년 일본 정부 인가를 받아 한일 양국에서 학력을 인정받는 정식 중·고교가 됐다. 남학생은 야구, 여학생은 K팝을 좋아해 이 학교 문을 두드린다. 일본 정규 학교이지만 한국어, 한국사, 한국 문화를 가르치며 한국계 학교 정체성을 유지한다. 학생 65%는 일본인이고 나머지는 한국 혹은 일본 국적의 재일교포, 한국인 유학생이다.

전교생은 160명에 불과하고 야구부원은 61명이다. 이날 결승 상대인 동도쿄 대표 간토다이이치 고교는 전교생 2500여 명에 야구부가 92명이다. 교토국제고 운동장 길이는 70m에 불과하다. 125m 안팎 정규 규격 야구장의 절반을 조금 넘는 열악한 환경이다.

좁은 운동장 때문에 선수들은 공을 멀리 치는 연습 대신 내야 수비 훈련에 집중했다. 이게 올해 고시엔 우승의 결정적인 원동력이 됐다. 본선 들어 결승까지 6차례 경기 중 3점 이상 내준 경기가 첫 경기인 1회전(3-7) 한 경기에 불과할 정도로 ‘짠물 수비’를 보여줬다.

● 교토시 축제 열기, 지역신문은 호외도 발행

교토국제고 야구부는 1999년 창단했다. 야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선수 12명으로 출발했다. 그해 봄 지역 예선 1차전에서 0-34로 대패하며 높은 벽을 실감했다. 재일교포인 김안일 야구부 후원회장은 “처음엔 치고 나서 3루로 뛰는 아이도 있었다”며 “고시엔 우승을 보고 회장직을 내놓겠다고 하니 주위에서 ‘100살 돼도 되겠냐’고 하더라. 꿈같은 일이 현실이 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8강 진출 후 “어느 학교가 우승할 거라고 생각하는가”를 묻는 일본 포털 ‘야후’ 설문조사에서 교토국제고를 꼽은 응답자는 4.7%로 8개교 중 가장 적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좌완 선발 원투펀치 나카자키 루이(中崎琉生)와 니시무라 잇키의 탄탄한 마운드를 토대로 연전연승을 했다.

학교가 있는 교토시는 축제 열기에 빠졌다. 교토 대표로 68년 만의 고시엔 우승에 교토역 앞 등 교토 시내에서는 지역 신문사가 발행한 호외를 배포했다. 호외를 받아 든 한 교토 시민은 “교토국제고의 모든 경기를 생중계로 봤다. 결승 막판 아슬아슬했는데 우승을 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한국어 교가에 기분 나쁘다” 같은 차별적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니시와키 다카토시(西脇隆俊) 교토지사는 “차별적 행위는 용서할 수 없으니 삼가 달라”며 심한 차별을 담은 4건에 대해 법무성 및 해당 사이트 운영자에게 삭제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에 “교토국제고의 고시엔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열악한 여건에서 이뤄낸 기적 같은 쾌거는 재일동포들에게 자긍심과 용기를 안겨주었다”고 축하했다.

#교토국제고#고시엔#첫 우승#일본#고교야구#한국어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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