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 이전 발병’ 급여 기준 올해 확대
18세 이전 발병 증명해야 급여 승인
현행 의료법 10년 지나면 기록 삭제
증상이 나타난 시점을 증명해야 급여 치료 기회가 결정되는 희귀질환이 있다.
척수성 근위축증(SMA)은 유전자 결손이나 변이로 온몸의 근육이 점차 위축되는 병이다. 영유아에서 증상이 나타나면 사망 위험이 크고 나중에 발병하더라도 평생 근육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
척수성 근위축증은 작년 9월까지 3세 이전 발병 환자에게만 급여 치료가 가능했다. 3세 이상 나이에 발병한 환자는 치료 효과가 불분명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추가적인 임상 연구로 급여가 확대되면서 성인 척수성 근위축증 환자도 치료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환자 본인이 18세 이전에 증상이 나타난 것을 입증할 과거 기록을 필수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제출해야 한다. 문제는 18세 이전의 과거 기록을 확보하기 어려운 환자도 많다는 것이다.
의무 기록부터 생활기록부까지… 18세 이전 과거 기록 부재 환자의 좌절
이승준(49) 씨는 중학교 1학년 때 당시 영동세브란스병원에서 근이영양증을 진단받았다. 당시에는 척수성 근위축증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의료진도 생소한 질환이었기 때문에 유사한 근육병인 근이영양증으로 진단한 것이다.
이 씨는 2023년 척수성 근위축증 3형 환자로서 치료제 임상 연구에 참여해 치료받다가 이를 중단하고 2024년 1월 급여 치료 신청을 했지만 ‘증상과 징후 발현 시점이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아’ 사전 심사 단계에서 급여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이 씨가 제출한 입·퇴원 기록에 ‘14세 증상 발현’이 명시돼 있음에도 해당 입·퇴원 기록이 이 씨가 22세이던 1997년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 씨는 근이영양증 진단을 받은 후에 같은 병원에서 물리치료와 재활치료를 계속해 왔다. 그럼에도 진단 시점이 거의 30년 전이기에 병원에서는 이 자료를 찾을 길이 없고 그나마 찾아낸 것이 1997년 기록이었다.
이 씨는 이러한 심평원의 사전 심사 절차가 환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행태라고 지적하며 지난 추석 명절 연휴 중 온라인으로 행정심판 청구를 진행했고 19일 건강보험 분쟁조정위원회에 이송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외 별도의 법무 대리를 통해 행정소송 소장도 접수를 완료한 상태다.
또 다른 척수성 근위축증 환자 김 모(44) 씨는 유아기 때부터 잘 넘어지고 걸음이 불편했다. 초등학생 때에도 앉고 서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어머니가 늘 걱정하던 자녀였다. 걱정 끝에 김 씨 초교 시절 방문한 동네 의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볼 정도였지만 당시 척수성 근위축증 질환에 대한 인지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인지 병원에서도 밥만 잘 먹으면 나아질 것이라고 하며 더 이상 내원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불편한 생활을 이어오던 중 2021년에는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리가 불편해져 남편의 권유로 서울 소재 상급종합병원에서 유전자 검사를 받았으나 ‘알 수 없는 근육병’이라는 진단만 받고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이듬해 남편이 수소문한 끝에 어렵게 찾아간 양산부산대병원에서 또 다른 유전자 검사를 받고 나서야 본인이 척수성 근위축증 환자라는 것을 알게 됐다. 증상이 나타난 이래 무려 30여 년 만의 진단이었다.
하지만 김 씨 역시 2024년 6월경 급여 신청을 두 차례나 했으나 증상과 징후 발현 시점이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급여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처음 방문했던 동네 의원은 이미 폐원해 방문 기록이나 엑스레이 결과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현재 주치의는 초교 시절의 생활기록부라도 제출해 보자고 권유했지만 당시 생활기록부에 건강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세세하게 적혀 있지 않아 그 역시 무용했다.
실제로 2022년, 2023년 100%였던 치료제 급여 승인율은 18세 이전 발병 환자에게까지 급여 확대된 2023년 10월 이후 54%로 급감했다. 이때 급여권에 진입한 신약은 65%의 승인율을 보이는 데 그쳤다.
이에 대해서는 급여 신청 환자 수가 증가한 만큼 불승인율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일각의 의견도 있다. 그러나 불승인 환자 10명 중 7명이 앞선 환자 사례와 같이 ‘증상과 징후 발현 시점’을 증명할 과거 기록이 부재한 경우라면 이 급여 기준이 합당한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희귀질환 분야 급여 사전심사제도에 대해 의료 전문가 A 교수는 “급여 심사가 의학적 판단이 아니라 심평원의 내부 규정에 따라 이뤄진다”라며 “의학적 타당성에 대한 논의보다 심평원이 미리 만들어 놓은 기준을 우선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A 교수는 “모든 환자에게 치료제를 쓰게 할 수 없으니 급여 기준을 좁게 설정하는 것인데 승인율이 계속 떨어진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 아니겠나”라고 언급했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급여 기준을 적용한 호주는 급여 신청서에 주치의 진단 외 증상 발현 시점에 해당하는 과거 기록을 필수로 요구하지는 않고 있다. 척수성 근위축증 환우회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척수성 근위축증 환자는 급여 치료를 위해 본인의 발병 시점을 확인할 수 있는 과거 기록을 찾으려 의료기관을 비롯해 학교, 병무청, 보건소, 보호시설 등을 다 뒤져봐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의무 기록이 아닌 생활기록부, 병역 기록 등에서 심평원이 인정할 만한 질환 증상 확인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진료 기록 보존 기한 10년, 척수성 근위축증 환자 발목을 잡다
척수성 근위축증 최초 치료제는 2016년 미국 식품의약청(FDA)이 승인해 국내에는 2019년에 도입됐다. 2016년 이전까지는 척수성 근위축증 질환에 대한 인지도가 낮고 진단 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기 때문에 오진단, 미진단 환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근이영양증이나 루게릭병으로 진단받았다가 최근 척수성 근위축증으로 확진받은 사례도 있다.
현시점에 1994년 이전 출생자(28세 이상)는 18세 이전 과거 기록을 찾고 싶어도 구조적으로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현행 의료법상 환자 명부 및 진료기록 보관 연한이 최대 10년이기 때문이다.
척수성 근위축증 환우회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현재 과거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척수성 근위축증 환자는 약 15명이다. 환우회 문종민 이사장은 “28세 이상 척수성 근위축증 환자의 경우 요양기관을 통한 진료기록 발급이 법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환자들에 대해서는 한시적이나마 사전 심사 승인을 허락해 달라”고 심평원에 요구하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강선우 의원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합리적이지 못한 심사 기준으로 인해 과거 기록을 찾느라 애를 써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라며 “국정감사를 통해 심사 기준, 심사 논의 과정 등이 환자 중심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상급 의료기관의 B 교수는 “희귀질환 치료제는 수천만 원에서 억대의 고가 치료제가 대부분”이라며 “심평원의 심사 기준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임상적 유효성이나 건보 재정 사용의 형평성을 생각한다면 해외처럼 희귀질환 환자를 지원하는 공익 기금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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