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날씨의 시대입니다. 지구가 뜨거워져 계절의 리듬이 뒤죽박죽됐으니까요. 그래도 가을은 무르익고 있어요. 서울에서 가까운 정원들에서 가을을 보았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쑥부쟁이와 곱게 물든 복자기 단풍도 좋았지만 정원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건 더 좋았습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에는 감각과 생각을 일깨우는 어떤 신비로운 힘이 있더군요. 그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문화 기업으로 가는 정원
정원이 잘 가꿔져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곳은 경기 가평군의 더스테이힐링파크였어요. 입구부터 정갈하게 쌓인 낮은 돌담이 소박하면서도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듯했어요.
길 따라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와일드 가든’을 만나게 됩니다. 유럽 수종(樹種)인 측백나뭇과(科) ‘블루엔젤’이 양옆에 심어져 있지요.
연갈색으로 변한 유럽 목수국 ‘핑키윙키’와 수크령은 독일 미술가 안젤름 키퍼의 ‘가을’ 그림 색감을 연상시키는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어요. 두 식물이 음악을 연주한다면 바이올린과 첼로의 이중주일 것이라고 상상했어요. 속도는 아다지오(adagio·느리게)….
정원의 끝에는 돌을 쌓아 지은 유럽풍 건물이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소박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정면에 있는 작은 예배당이었어요. 저절로 기도를 부릅니다. 이 정원은 둘러볼수록 으스대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어떤 정원들은 ‘이런 철학으로 정원을 만들었노라’며 감상을 강요하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아 좋았습니다. 정원은 자랑과 설교의 대상이 아니라 공감하고 나누는 곳이었으면 해요.
자작나무는 똑같은 두께를 일렬로 심은 게 아니라 굵고 가녀린 나무를 다양한 간격으로 섞어 심었습니다. ‘포레스트’라는 이름의 복층 숙박 시설은 숲의 나무를 베어내지 않고 지었기 때문에 나무와 건물이 어우러진 트리 하우스 같습니다.
내부에서 밖을 내다보면 가을의 계절감이 오롯이 시야에 들어와요. 동물원 가는 수국길에는 미국낙상홍이 목수국의 커다란 얼굴 뒤로 빨간 열매를 배경처럼 드리웁니다. 야간에 조명을 밝힌다는 ‘별빛 정원’은 어쩔 수 없이 인공적 느낌이 있지만, 그곳에서 본 포도주 빛깔의 해당화 열매가 마음에 여운을 남깁니다.
이 같은 ‘자연 교향시’의 지휘자는 구두 브랜드 ‘소다(SODA)’로 잘 알려진 DFD그룹의 박근식 회장입니다. 1976년 구두 제조로 시작한 이 기업은 2017년 사명을 ‘DFD LIFE. CULTURE’로 바꾸고 ‘의(衣), 식(食), 주(住), 휴(休), 미(美), 낙(樂)이 어우러지는 라이프스타일과 문화를 제안하는 기업’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가평 보리산 기슭에 문을 연 곳이 더스테이힐링파크입니다.
굳이 숙박하지 않더라도 파크 안 ‘나인블럭’에서 차를 마시거나 식사하면서 6만 평의 정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정원은 제조업에서 시작한 기업의 방향을 라이프스타일과 문화로 확장시켰습니다.
건축가 최시영을 살린 정원
경기 광주시에 있는 최시영 건축가(68)의 정원 ‘파머스 대디’에 도착했을 때, 최 건축가는 정원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이 정원에서 조만간 한국인-프랑스인 지인 커플의 결혼식이 열릴 예정이거든요. 프랑스에서 하객들이 오니 한국 정원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잘 정비해야죠.” 이곳은 그의 감각과 경험이 직조된 정원입니다. 고추와 가지를 키우는 텃밭, 수세미와 으름덩굴, 허수아비도 있어요.
그는 서울 강남 타워팰리스와 롯데월드타워 시그니엘 레지던스 등 고급 주거공간을 지어 온 스타 건축가입니다. 그런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2000평의 밭을 농장형 정원으로 만들기 시작한 건 2010년. “저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니까 밭도 디자인한 거죠. 손님들에게 입장료를 받으려니 미안해서 꽃을 심기 시작했어요. 밭으로 입장료 받은 사람은 제가 처음일 걸요?”(웃음) 그는 뾰족지붕에 창문까지 있는 비닐온실을 만들어 그곳에서 차를 팔고 해외 정원잡지를 소개하며 정원문화 전도사 역할을 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정원을 상시 개방하지는 않지만 필요에 따라 대관하거나 열고 있습니다. 그에게 정원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에 치여 바쁘게 살다 보니 한동안 정신이 무너졌어요. 그런 저를 위로해준 게 정원이었어요. 정원에서의 시간은 ‘빨리빨리’인 세상의 속도와 정반대로 느리게 흘러요. 건축 설계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워 버리면 되지만 식물은 잘못 심었어도 살아 있는 생명이니 적어도 1년은 기다려야 해요. 그게 달라요. 그렇게 위로받으면서 희망의 신비로운 에너지를 느꼈어요.”
정원에 빠져든 그는 어느 날 선언합니다. “앞으로는 정원과 관련된 건축 설계만 하며 살겠다.” 그중 하나가 2017년에 문을 연 경기 이천시의 에덴낙원 메모리얼 리조트입니다. 그는 전체 1만5000평 중 3000여 평을 정원으로 조성해 죽은 자뿐만 아니라 산 자를 위한 봉안당(납골당)을 만들었습니다. 호텔, 카페, 레스토랑이 있어 추모의 공간에서 결혼식도 열리는, 삶과 죽음이 정원에서 만나는 ‘창조적 혁신’의 공간입니다. 이 정원을 보러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3년 전 에덴낙원에서 가족과 하룻밤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아침에 정원을 산책하는데, 마침 떠오르던 해가 직사각형 연못을 비추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이토록 축복이구나.’ 그 에덴낙원을 낳게 한 최 건축가의 ‘파머스 대디’에도 작은 직사각형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 옆 소박한 의자에 앉아 그가 말했습니다. “사색과 위로의 공간인 정원이 저를 살렸습니다.”
정원사를 길러내는 정원
경기 광주시 ‘세븐시즌스’는 정원을 가꾸는 이들에게는 잘 알려진 곳입니다. 서울 서초구에서 20여 년간 꽃 농장을 운영하면서 가드닝 수업을 해 오던 김재용 대표(60)가 3년 전 이곳에 3000여 평의 땅을 매입해 가꾼 초지형 정원입니다.
주로 조부모 부모 손주 등 3대 가족 손님들이 찾아와 몇 시간씩 정원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국화과(科) 아스타와 여러해살이풀들이 흐드러져 한창 가을 수채화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정원을 함께 걸으면서 김 대표가 말합니다.
“절기가 참 신기하죠. 곧 상강(霜降)이 되어 서리가 내리면 풀들의 녹색물이 죄다 빠지고 온통 갈색으로 바뀌게 돼요. 가을은 봄 여름에 꽃을 피워냈던 식물들이 씨 송이를 맺고, 촛불처럼 흔들리는 억새의 동적인 요소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계절이에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흔들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식물뿐만 아니라 흔들리니까 사람 아니겠습니까. 가을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지만 잎을 떨구고 흔들리고 떠나기도 하는 쓸쓸한 계절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가을의 중턱에서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구대 원예학과를 나와 꽃 농사를 짓던 중 농업후계자로 선발돼 보름간 원예 선진국들을 둘러봤습니다. 식물만 키우던 제게 그들의 여유로운 정원문화는 충격이었어요. 48세에 신구대 컬러디자인학과 3학년에 편입해 디자인을 배운 뒤 정원 설계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남의 집 정원들만 디자인해 주며 살 건가 싶더라고요. 대출을 받아 이곳을 마련한 뒤 정원을 가꾸길 원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정원 조성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카페나 레스토랑도 예쁜 정원이 딸려 있어야 손님을 모으니까요. 정원에서 제 삶도 새로운 길이 열렸어요.”
세븐시즌스는 ‘독일 정원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원사이자 작가였던 카를 푀르스터(1874∼1970)가 고안한 ‘일곱 계절의 정원’ 개념에서 영감을 받아 붙인 이름입니다. 푀르스터는 1년을 초봄, 봄, 초여름, 한여름, 가을, 늦가을, 겨울의 일곱 계절로 분류하고 각각의 계절이 지닌 정원의 아름다움에 주목했습니다. 늦가을이나 겨울 정원마저 아름답게 보인다면, 정원 식물뿐만 아니라 정원의 시간을 알아보는 마음의 눈이 아름다운 거겠죠.
계절의 순환은 탄생, 성장, 성숙, 죽음 같은 인간의 삶을 모든 모습으로 비춰 줍니다. 멀리 떠나지 않더라도 가을이 내려앉은 가까운 정원들을 여행하면서 삶의 방향을 한 번쯤 점검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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