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문학 속으로]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2016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
한국 사회의 관습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2007년 출간된 소설 ‘채식주의자’는 어느 날 육식을 거부하는 주인공 ‘영혜’의 이야기를 다룬다. 2004∼2005년 ‘창작과 비평’ ‘문학과 사회’ 등에 연재한 소설 3편을 엮었다. 1부 ‘채식주의자’, 2부 ‘몽고반점’, 3부 ‘나무 불꽃’은 각각 영혜를 바라보는 남편, 형부, 언니의 시선을 담았다. 소설 내 영혜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그려지는 영혜는 가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가부장적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채식이라는 ‘식물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2016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하며 한강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된 소설. 당시 심사위원장인 영국 인디펜던트지 문학선임기자 보이드 턴킨은 “잊히지 않는 강력하고 근원적인 소설”이라며 “정교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로 아름다움과 공포의 기묘한 조화를 보여줬다”고 평했다.
소설은 채식주의자가 되는 영혜의 모습을 섬뜩하면서도 괴이하게 그려낸다. 설정이 다소 충격적이고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한강도 맨부커상 수상 소감에서 “채식주의자를 쓰는 것은 인간에 대해 내게 끝없이 질문하는 과정이었다”며 “그것은 종종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지만 최대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려 했다”고 밝혔다. 작가의 질문을 상상하면서 독서하면 표면적인 묘사 속에 숨겨진 책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다.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끌리지도 않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 각질이 일어난 노르스름한 피부….”
1부 ‘채식주의자’는 영혜가 ‘특별하지 않아서’ 좋았다는 남편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영혜가 갑작스런 채식으로 특별한 사람이 되면서 그녀는 남편에게 불편함을 유발하는 존재가 됐다. 남편에게 영혜는 그저 좋아하는 고기반찬을 해주지 않는 이기적인 여자다.
“다진 생강과 물엿으로 미리 재워 향긋하고 달콤하게 튀긴 삼겹살, 샤브샤브용 쇠고기를 후추와 죽염, 참기름으로 간하고 찹쌀가루를 앞뒤로 입힌 뒤 구워 마치 떡이나 전 같던 그녀만의 특별식.” 자신의 아내를 볼 때보다 자세하고 관능적인 묘사다. 영혜가 육식을 거부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온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지만 이에 대해 남편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늘 무관심하고 관조적인 남편의 시선은 영혜가 그동안 순응해 온 가부장적 질서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남편은 처가 식구들을 동원해 영혜의 채식을 말리려 한다. 영혜의 언니 인혜의 집들이에서 영혜가 육식을 또 거부하자 영혜의 아버지가 억지로 그녀에게 고기를 먹이려 한다. 탕수육을 그녀의 입안에 억지로 욱여넣으려다 되지 않자 영혜의 뺨부터 치는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은 억압적인 사회 규범을 상징한다. “한 번만 먹기 시작하면 다시 먹을 거다. 세상천지에, 요즘 고기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영혜는 저항하기 위해 칼을 들어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이는 가수 김창완이 한강과 함께한 방송에서 “안 읽겠다. 뒤로 가면 너무 끔찍하다”고 미간을 찌푸린 장면이기도 하다. 한강은 “이 장면이 끔찍하고 불편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세 개의 장에 이뤄진 소설에서 각자 화자의 관점에서 다시 나올 만큼 중요한 장면”이라고 했다.
2부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 관점에서 진행된다. 아내 인혜에게서 영혜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형부는 영혜의 몸을 욕망하게 된다. 자신의 아내는 특유의 쾌활한 성격과 예쁘장한 얼굴로 화장품 가게를 하면서 아이들도 살뜰히 돌보는 ‘슈퍼맘’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아내보다 무기력한 얼굴로 나뭇가지 같은 몸매를 가진 처제 영혜에게 끌리게 된다.
결국 형부는 영혜를 찾아가 비디오 작품의 모델이 돼 달라고 청한다.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기까지의 과정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몽고반점 이야기를 들은 뒤 떠올린 영감대로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 영혜와 교합하고, 그 장면을 비디오 작품으로 촬영한다. 다음 날 벌거벗은 두 사람의 모습을 아내가 발견한다.
아마 채식주의자를 읽기 힘들단 반응이 나오는 것도 몽고반점의 영향이 커 보인다. 형부가 처제에게 욕망을 품는다는 파격적 설정과 외설적인 묘사 때문일 것이다. 2005년 몽고반점이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문단의 선배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도 등장인물 중 몸에 페인트칠을 하는 형부에 ‘꽂혀’ 여러 심사평을 남겼다고. 그때 한강은 “저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관심한 남편, 폭력을 자행하는 아버지와 방식만 다를 뿐 영혜에게 성적 접근을 시도하는 점에서 형부도 영혜를 옭아매는 가부장제의 한 요소다.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영혜의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보면 자극적으로만 읽히던 작품이 달리 보인다.
3부 ‘나무 불꽃’은 가족들 모두 등 돌린 영혜의 병수발을 들어야 하는 인혜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인혜는 식음을 전폐하고 링거조차 받아들이지 않아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는 영혜를 만나고, 영혜는 자신이 이제 곧 나무가 될 거라고 말한다. 햇빛과 물만으로 살아가는 동생을 보며 인혜는 내면의 변화를 맞는다.
어린 시절 각인된 폭력의 기억 때문에 철저히 육식을 거부한 뒤 나무가 되기를 꿈꾸는 영혜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무해한 존재를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한강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스웨덴 한림원은 채식주의자에 대해 “혐오, 성적 매혹, 질투 등 주변 인물들의 다채로운 반응을 그린다. 이는 가족에게 수치심을 안겨줬다는 죄책감을 인정하지 않고 묵묵히 저항하는 영혜의 태도와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고 평가했다. 또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와 직업주의, 때로는 폭압적인 사회 규범과 관습에 대한 날카로운 자화상을 엿볼 수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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