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서울 성수동에서 봤던 자작나무 그림자가 내내 마음에 저장돼 있었다. 길가의 작은 정원 속 자작나무들이 우란문화재단 건물의 흰 벽면을 배경으로 산들산들 흔들리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곳은 도심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 건축물 대지 일부를 공공에 개방한 공개공지였다. 시민들이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한가로이 쉬는 모습을 보면서 공공 정원이 도시의 오아시스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햇볕도 바람도 온도도 거슬림 없이 딱 좋은 계절, 가을이 찾아오자 그 인상 깊던 자작나무의 안부가 슬슬 궁금해지던 터였다. 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지인의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보게 된다. “문구 마니아들의 개미지옥, 성수동 포인트오브뷰에서 문학동네 시인선 팝업 전시가 열리고 있어 다녀왔어요. 매일 시인분들이 상주하면서 책 추천과 사인을 해주세요.” 가을, 나무, 문구, 시(詩)…. 이토록 환상적인 조합이라니. 서울 지하철 2호선 성수역 4번 출구에서 내려 성수동을 걷기 시작했다.
우란문화재단의 자작나무는 일부 노랗게 변한 잎사귀가 가을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름꽃인 가우라와 가을꽃인 쑥부쟁이가 공존하는 바로 옆 성수역현대테라스타워의 공개공지 화단을 지나자 물이 흐르는 ‘수생비오톱’이 나왔다. 비오톱은 생물 공동체 서식지를 뜻한다. 나비와 새들이 찾아오도록 횃대와 돌무지를 만들고 수생식물과 나무를 심었다. 과거 쇠퇴한 공장지대에서 젊은이들의 ‘핫플’로 변모한 성수동에서 공공 정원을 만나는 게 고마웠다. 성수동에는 먹고 마시는 팝업스토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세계적 럭셔리그룹 루이비통모엣헤네시(LVMH)가 2년 전 성수동을 콕 찍어 문을 연 크리스찬디올의 컨셉 스토어 ‘디올 성수’는 정원에서 한창 크리스마스 조경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프랑스 정원을 연상시키는 원뿔형 나무들은 구슬 조명을 두르고 그 아래로는 장미꽃밭이 펼쳐지고 있었다. 흰색 가림막 사이로 빼꼼히 정원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인부들이 “며칠 있으면 보게 될 텐데요”라고 했다. 맞은편 탬버린즈 성수 플래그십스토어는 최근 세계적 건축·인테리어 잡지 프레임(FRAME) 어워드에서 건축과 조명의 창의성을 인정받아 ‘올해의 브랜드스토어’로 선정됐다. 빛의 질감과 감각은 공간 경험의 질을 결정한다. 우아한 빛이 도시 경관과 우리 마음을 밝혀주기를….
디올성수를 끼고 골목길로 접어들면 곧 ‘포인트오브뷰’에 도착한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시대에 종이와 펜, 심지어 도장의 물성(物性)까지 귀하게 여기는 편집숍이 성수동 한복판에 있는 것도 신기한데, 늘 MZ세대들로 북적이기까지 한다. 젊은 층이 시를 통해 위로를 받으니 시집 팝업 전시까지 열리게 된 것이다.
내가 방문한 날에는 고선경 시인이 독자를 만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를 사서 사인을 요청했더니 ‘무한히 터지는 기포를 담아’라고 써 주었다. 그 짧은 문장에서 톡 쏘는 소다수의 느낌이 확 전해졌다.
“정원과 관련한 시를 읽고 싶은데요”라고 했더니 고 시인은 곧바로 안희연 시인의 ‘당근밭 걷기’ 시집을 추천했다. 처음엔 표제작에 나오는 당근밭이 넓은 의미의 정원이라 권했나 싶었는데 시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자주 멈춰 서는 사람이군요. 당신은 나에게서 안개 숲을 보고 있네요(중략). 그래도 당신의 장면이 마음에 듭니다. 길가에 쪼그려 앉아 눌어붙은 초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당신이.’ -안희연, ‘가는잎향유’ 중에서
‘그의 하루를 지켜봅니다. 잠에서 깨어나 상을 차리고 먹다 만 밥을 치우고 티브이를 보다가 다시 잠드는 생활입니다. 그는 좀처럼 외출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에게 발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아주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물을 글썽이는 것 외엔 미동도 없습니다. 물과 햇빛이 필요한 건 오히려 그쪽인 것 같습니다.’-안희연, ‘율마’ 중에서
안희연의 시에서 화자(話者)는 인간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식물이 인간을 관찰하고 말을 하고 생각을 한다. 식물 입장에서 보면 인간도 돌봄과 긍휼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다른 생명체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다. 얼마 전 읽었던 ‘식물의 사유’라는 책이 떠올랐다. 자연은 우리가 숨 쉬고, 감각을 통해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지만 우리는 자연환경을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일과 생활에 치여 이리저리 돌진하다가 서서히 생명이 사라진다는 구절이 있었다.
‘살아있고 변화하는 것으로서 나무의 존재를 봐야 합니다. 우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자작나무에 같은 이름을 부여합니다. 이름은 나무의 형태, 색깔, 소리, 냄새를 가리키는데 이런 감각들은 하루 사이에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한 해의 시간이 바뀌면서는 완연히 달라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작나무에 동일한 이름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자작나무를 말하기 위해 늘 같은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자작나무의 생생한 현존(現存)으로부터 자작나무를 지워버립니다. 또 자작나무와 함께 현존으로 들어가려는 우리의 감각을 스스로 박탈합니다.’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의 ‘식물의 사유’ 중에서
포인트오브뷰 이야기로 돌아오면, 이곳에는 ‘비밀의 정원’이 있다. 건물에 들어서면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안뜰에 작은 온실과 정원이 있다. 지금 문학동네 팝업 전시에서는 이 온실이 ‘시의 집’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만난 다양한 시가 마음속 정원에 피어나 자리 잡았다. 도시의 정원은 아스팔트 같은 일상에서 때로는 톡 쏘고 때로는 마음 저미고 때로는 환희에 넘치는 저마다의 시를 쓰게 해주는 게 아닐까. 계절을 음미하고 다른 생명체들에 귀 기울이고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언젠가 누군가와 남도의 풍경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기 정말 좋았어요 아주 인상적이었요 말하게 되는 그 순간에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것이겠지. 나는 너와 소쇄원의 오래된 건물 사이를 걸었을 것이다 나무에 매달린 꽃들에 렌즈를 가까이 들이밀며 소쇄원이 보이지 않는 사진을 찍었을 것이고…’-황인찬,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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