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관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5일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자 당 안팎은 거의 폭탄 맞은 분위기다. “정치 판결” “미친 정권의 미친 판결” “사법 살인” 소리가 터져 나온다. 심지어 공직선거법에서 ‘허위사실공표죄’를 삭제하는 법안까지 발의했다. 이재명을 위한 아부성 법안 상납이다.
묻고 싶다. 민주당은 입때껏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를 몰랐단 말인가? 당 대표 비서실장 이해식 의원이 이재명의 빗속 연설 사진과 함께 올린 “신의 사제, 신의 종”이라는 글처럼 신성(神性) 가득한 무균 무때 정치인인 줄 알았던가?
2021년 8월 말 ‘이재명 후보님, (주)화천대유 자산관리는 누구 것입니까’란 칼럼이 경기경제신문에 실린 이후, 아니 실은 그 전부터, 이재명 주변엔 꺼림칙한 법적 도덕적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지느냐가 문제일 뿐. 그래서 이재명은 대선에서 패하기 무섭게 금배지에 당 대표직까지 겹겹이 방탄복을 껴입고는 민주당을 볼모로 장악했던 거다. 패장은 잠시 정계를 떠나는 기존 정치문법까지 무시한 채.
● 이낙연 측 “대장동 문제로 민주당 위기”
민주당은 이번 판결이 윤 정권의 ‘대선 후보 죽이기’라고 주장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대선 후보 치고 이재명 같은 전례가 없다. 범죄 혐의 그득한 사람을 민주당이 대선 후보로 뽑았을 뿐이다. 심지어 대선 경선 내내 이낙연 캠프 측은 “대장동 문제가 정권 재창출의 위기, 민주당의 위기가 돼선 안 된다”고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를 누누히 경고했다. 귀담아 듣지 않았던 민주당, 특히 이재명 지지자들은 제 발등 찍어야 마땅하다.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숱한 네거티브를 겪은 사례는 있다. 아들이 병역을 회피했다는 병풍(兵風) 의혹은 거의 치명상이었다. 병풍을 터뜨린 김대업은 2004년 대법원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선 후보로서 이회창이 ‘내 삶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뼈아픈 회한을 남긴’ 일이라던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 사건은 2003년 10월 터졌다.
그는 누구처럼 잡아떼지 않았다. 전모를 다 알진 못했다지만 “전적으로 저의 책임”이라며 곧바로 대검중수부로 가서 조사받았다. 불법 대선자금은 이회창 측 823억원, 노무현 측 119억원으로 드러났고 검찰은 당시 노 대통령과 이회창에 대해선 모금과정에 직접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불입건 처리하고 실무자들만 처벌하고 끝냈다. ‘정치보복’은 없었던 셈이다(수사 검사 중 윤석열 검사가 있었다).
● 민주당 대선 후보는 바뀔 수도 있었다
이재명의 ‘혐의’는 다르다. 대선 후보일 때, 그러니까 현 대통령의 정적일 때 지은 죄가 아니고, 과거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때 저지른 자업자득이다. 이낙연 측에선 “이재명 후보가 구속될 수도 있다” “대장동 의혹이 당에 위험요인이 되지 않기 바란다”고 분명히 경고했다. 이 때문인지 2021년 10월 5일 마지막 TV토론 뒤 국민여론조사 성격이 강한 3차 선거인단 투표에선 이낙연이 62.37%로 이재명(28.30%)을 크게 앞섰을 정도다.
만일 최종합계에서 중도사퇴한 정세균 김두관 표를 사표처리하지 않고 전체 투표자 수에 합쳤다면, 이재명의 누적 득표율은 50.29% 아닌 49.3%로 내려간다.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이낙연과 결선투표를 해야 한다. 민주당 대선 후보가 뒤바뀔 수도 있었다는 의미다.
패자의 흔쾌한 승복 없이 이재명을 대선 후보로 뽑은 지 열흘도 안 돼 대장동 의혹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남욱이 미국서 돌아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국에 며칠만 일찍 들어왔으면 (이재명) 후보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네요.” 귀국 바로 다음날 이재명 최측근 김용이 체포돼 사흘 만에 구속된 것이다. 대장동 일당으로부터의 자금 수수 자체를 부인했던 김용은 결국 그들에게 경선 무렵 선거자금을 받은 혐의로 작년 11월 1심 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돈을 건넨 남욱은 징역 8개월이다. 그 ‘윗선 의혹’이 있는 이재명에 대해선? 마냥 늘어지게 재판중이다.
● 민주당은 단체로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렸나
대선 패장은 “오롯이 내 책임”이라며 당분간 해외로 떠나든지 보통 자숙의 기간을 갖는다. 1992년 김대중(DJ)부터 2022년 경선 패자 이낙연도 대충 비슷했다. 엄밀히 보면 이 공식은 2012년 문재인 때 깨졌다. 그는 대선 출마 때도 의원직을 놓지 않았고 대선에 패하자 백의종군한다면서도 여의도에서 국정 발목잡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재명은 한술 더 떴다. 대선에 패한 뒤 청년정치인 박지현을 앞세워 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부터 장악했다. 새미래민주당 전병헌 대표의 한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민주당은 아직 친문(친문재인)이 주류였다. 친문은 이낙연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보내 당을 수습하려 했다. 그런데 대선 패배 책임을 진다며 대표직을 사퇴했던 송영길이 돌연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고 인천 계양 의원직을 던진다. 그 자리에 이재명이 나섰다. 지역구 유세 중 이재명이 제 손으로 제 목 치는 시늉까지 해가며 “이번에 이재명 지면 정치생명 끝장난다. 진짜요. 끽” 하는 영상을 보면, 의원 불체포특권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실감이 난다.
금배지도 못 미더웠는지 이재명은 그해 8월 당대표로 나섰다. 그리곤 검찰이 기소해도 대표직을 유지할 수 있게 방탄 당헌으로 고치고, 공천권을 무기로 ‘비명횡사, 친명횡재’를 밀어붙여 민주당을 완전 이재명당으로 만들었다. 올 8월엔 대표 연임까지 성공해 24년 만에 DJ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이재명 유일체제가 된 70년 역사의 민주당에서 지금 이재명한테 ‘개인 비리 혐의’가 수두룩했다는 소리는 입 밖에도 내기 힘들다. 그래놓고 이제와서 생전 처음 이재명의 범죄 혐의를 들은 것처럼 “정치 판결” 운운하는 건, 솔직히 웃긴다. 마치 인질들이 인질범에 애정과 연민, 애착을 갖게 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것 같다.
● 가난하게 자랐다고 다 이재명 같진 않다
이재명에게 강점이 많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가난 속에 태어나 열세 살에 공장노동자가 됐고 장애도 입었으나 검정고시로 대학에 갔다. 고시 합격 후 호의호식 마다하고 노동변호사로, 시민운동으로, 마침내 어려운 사람을 위해 정치하겠다고 나선 서사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감동을 뛰어넘는다. 이재명이 대선 후보일 때 유시민은 ‘머리 좋고 학습 능력이 뛰어나 목표를 정하면 자기 자신을 계속 바꿔나가는 사람’이라고 MBC에 나와 평했다. 비슷한 의미로 진중권은 이재명을 ‘극단적으로 발달한 기회 이성의 소유자’라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어떤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그래서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드는 강한 추진력이 장점인데 누구처럼 자신만 알고 공사(公私)구분을 못한다는 게 나는 무섭다.
1960년대 가난하게 자란 사람이 어디 이재명 뿐이랴. 그는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서 청소부였던 아버지가 썩은 과일을 주워와 가족들에게 먹이곤 했다고 썼다. 나이 들어 내 돈으로 신선한 과일을 사 먹게 되니 어찌나 후련했는지 모른다고도 했다. 그런 사람이 경기도지사 시절 도 예산으로 과일을 2791만원어치나 먹었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법카 불법 사용을 공익제보한 조명현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법카’에서 지사 공관 냉장고에 아침마다 모닝 샌드위치 3종 세트(샌드위치 2개, 닭가슴살 샐러드, 컵과일 2개)를, 락앤락 반찬통엔 산딸기나 블루베리를, 야채 칸에는 사과와 복숭아를 지퍼 팩에 넣어두어야 했다고 썼다. 7급 공무원의 꼼꼼한 제보 덕에 검찰은 최근 이재명의 1억 원 넘는 경기도 예산 사적 사용과 법인 카드 유용을 기소할 수 있었다.
쪼잔한 기소라고? ‘공적 지위를 남용한 사적 이익 추구’가 바로 부패다. 저서에선 성남시 ‘청년 배당’ 덕에 3년 만에 처음 과일을 사먹었다는 학생을 눈물겹게 소개하면서 뒤로는 태연히 자기 잇속 차리는 이재명의 다면성이 섬뜩한 거다.
● 이재명과 민주당을 분리하라
민주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연구보고서 ‘민주당의 역사와 정치철학’에서 “민주당은 K시대를 선도하는 대한민국 대표정당”이라고 했다. 2024년 8월 ‘다시 뛰는 대한민국’을 약속한 이재명 대표의 연임으로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당원 중심 정당, 함께 잘 사는 미래를 만드는 준비된 정당”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재명 한 사람을 결사 옹위하는 정당은 민주정당이랄 수 없다.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일 뿐이다.
이재명이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진작 대표직을 내려놓고 재판 받아야 했다. 진정 자신 있고 당당하다면 애초 금배지를 달겠다고 나서지도 않았을 터다. 안타깝게도 이재명에게 공선사후(公先私後)는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국민의 복이 거기까지인지 슬프지만 만일 그에게 공적 책무감이 남아 있다면, 이제라도 다수당 대표로서 정부 도울 일은 돕겠다고 나서주면 좋겠다. 이재명을 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못한다면, 민주당은 이재명과 갈라설 길을 찾아야 한다. 70년 역사의 민주당이,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을 역사적으로 구현해온 정통정당’이라는 민주당이, 숱한 범죄 혐의를 안고 있는 이재명에 인질로 사로잡힌 모습을 더는 봐줄 수 없다. 이재명만 아니라면 민주당을 지지하겠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윤석열 정부가 너무 못해서, 그동안 바친 순정이 아까워서, 이재명을 버릴 수 없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생물이고 억지로 되는 일은 없다. 국고보조금을 받는 민주당은 극성 당원들만의 정당일 수 없다. 백범이 원했던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원한다면, 민주당은 이제 이재명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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