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일류여야” 45년 지켜온 ‘수펙스’ 가치… HBM 1위 이끌어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2월 4일 03시 00분


[기업 한류, K-헤리티지로] 〈8〉 재계 2위 이끈 ‘경영헌법’ SKMS
인재 관리 등 최종현의 ‘SKMS’… 그룹내 ‘헌법’으로 불리는 경영원칙
대형 M&A 거치며 14차례 개정… “구성원 동화-신기술 개발 이끌어”
정유-배터리 등 위기감에 재조명


최근 찾은 경기 용인시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공사 현장. 부지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곳곳에선 최고 높이 240m, 최저 높이 85m의 부지를 평균 높이 125m로 평탄하게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평탄화 공사가 완료되면 126만 평(약 416만 ㎡)가량의 부지가 평지가 된다고 했다. 공사 현장 관계자는 “이곳에 반도체 팹 4기가 들어설 것”이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흙먼지가 날리는 광활한 이 현장은 특히 세계 최대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기지가 들어설 토대다. HBM은 최첨단 인공지능(AI) 칩에 필수적인 메모리 반도체다. 만년 메모리 2위 SK하이닉스를 AI 생태계 주역으로 발돋음하게 만든 일등공신이다.

HBM은 2012년 SK 인수 전 오랫동안 매물로 떠돌던 ‘하이닉스’의 화려한 부활을 상징하기도 한다. SK는 하이닉스 출신 최고경영자(CEO)들을 임명하며 기존 문화를 존중하되, SK만의 ‘SKMS(경영관리시스템)’를 뿌리내려 경쟁력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SKMS는 SK 내에서 ‘헌법’으로 불리는 경영 기법이자 45년 된 헤리티지로 꼽힌다. 1980년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등 성공적 인수 뒤에도 SKMS가 있었다.

● 최종현, 첫 SKMS 선언 “경영관리 일류여야”


1979년 3월,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이 선경(현 SK) 임원들을 불러모았다. 4년 동안 개발해 온 SKMS를 공개하는 자리였다. 최 선대회장은 “세계 일류 기업이 되려면 경영관리 수준이 일류가 돼야 하고, 사람의 수준 또한 세계적으로 일류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요 기업들이 그룹의 ‘설비 경쟁’에 치중할 때 그룹의 경영관리, 특히 인재 관리의 비전과 목표를 체계화해 정리한 것이다. 재무, 기획 등 경영의 기본 원칙뿐만 아니라 당시로선 등한시되던 기업 구성원의 의사소통, 패기 등도 헌장처럼 글로 적은 것이 특징이다.

하영원 서강대 경영학부 명예교수는 “구체적인 경영 원칙들을 종합해 하나의 문건으로 만들고, 사람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요소를 정의한 건 굉장히 앞선 판단이었다”고 평가했다.

14차례가량 개정돼 현재까지 헤리티지로 이어져 오는 SKMS는 ‘구성원의 행복’ ‘패기 있는 구성원 육성’ ‘수펙스(Super Excellent)’의 추구 등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기업 경영의 목표를 수펙스까지 끌어올리자는 의미로 현재 그룹 컨트롤타워 이름도 ‘수펙스추구협의회’다. 이 같은 SKMS가 SK가 대형 인수합병(M&A)을 거쳐 정유 및 에너지-통신-반도체 등을 중심으로 재계 2위로 뛰어오르는 기반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 교수는 “대형 M&A 이후 물리적 결합은 했지만 화학적 결합을 어려워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라며 “SK는 SKMS에 각 기업에서 다르게 쓰이던 경영이나 기술 개념을 명확히 정의해 구성원들이 동화될 수 있도록 하는 등 경쟁력을 높이는 기반이 됐다”고 평가했다.

● HBM 1등 뒤엔 패기와 수펙스 기업문화


45년 동안 지켜 온 SKMS의 주요 원칙인 ‘패기 있는 구성원 육성이 필요하다’는 철학은 SK하이닉스의 세계 최초 HBM 개발도 이끌었다.

SK하이닉스와 HBM 개발 협업을 해왔던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는 “HBM 개발을 위해선 새로운 물질, 새로운 공정을 도입해야 하는데, 과장이나 사원도 임원에게 대드는 하이닉스 문화가 도움이 됐다”며 ‘패기의 기업문화’가 기술력을 높인 동력이었다고 말했다.

초기에 SK 내부에선 HBM 개발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개발비는 비싸고, 수요는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당시 최태원 회장은 연구소를 찾아 “M&A나 투자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더 큰 수확을 기대하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며 개발을 독려했다. SK하이닉스 박명재 부사장(HBM설계 담당)도 “비관론도 있었지만 최고의 제품만 개발하면 이를 활용할 서비스는 자연스레 생길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사원과 임원이 ‘싸우면서’ 만들어낸 대표적인 기술이 ‘MR-MUF’ 기술이다. D램을 쌓아올릴 때 나오는 열을 식히기 위해 액체 형태의 보호재를 주입한 것이 차별점이다. 안정적인 HBM 양산을 가능케 한 주역이다.

HBM은 성공적이지만 최근 SK그룹에 위기감도 팽배하다. HBM은 성공적이지만 정유, 배터리 등 다른 주력 사업이 국내외 안팎의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SK는 이를 돌파할 동력도 SKMS에서 찾고 있다. SK그룹에 따르면 지난달 최태원 회장 등 주요 경영진이 참석해 경영 현안을 논의한 ‘CEO세미나’에서도 SKMS 실천력 강화를 주요 의제로 채택했다.

그룹 운영 개선의 ‘키’로 SKMS를 내세운 배경에는 구성원들의 자발성과 의욕을 중시한 그룹 철학이 약해지고 있다는 내부 평가가 작용했다. 5월 임직원 1만5000명이 참석한 ‘SKMS 실천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임직원들은 “과거에 비해 리더들이 이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응답했다. 이에 최 회장은 8월 이천포럼에서도 SK CEO들에게 “SKMS를 다시 살펴보며 우리 그룹만의 DNA를 돌아보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의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고 위기 돌파를 주문했다.

#SK그룹#최종현 선대회장#SKMS#헤리티지#H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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