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NOW]
이번 시즌 등장한 다양한 팬츠… 팬츠리스 동참한 미우미우-샤넬
강렬하고 섹시한 원 레그 팬츠
스커트 팬츠 선보인 에르메스-구찌
바지가 달라졌다. Y2K라는 거대한 트렌드는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거리를 활보하던 그 시절 힙합 바지를 소환했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자유로운 세기말 감성이 깃든 90년대 스커트 팬츠가 때아닌 활개를 쳤다. ‘이것만큼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심정으로 20여 년 전 떠나 보낸 스키니 진이 돌아오는가 하면, 허리선이 올라가다 못해 가슴선 아래로 안착한 슈퍼 하이웨이스트 실루엣 팬츠가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이제는 익숙한 키워드가 된 팬츠리스는 또 어떤가. 속옷과 팬츠의 경계를 허문 극도로 짧은 쇼트 팬츠에서 더 나아가 바지를 입지 않는 파격으로 패션계에 충격을 안긴 노 팬츠 룩까지 그야말로 요즘 팬츠는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각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있듯이 팬츠 또한 다양한 관점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2025 봄·여름 컬렉션에서 팬츠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먼저 지난해 팬츠리스 열풍을 쏘아 올린 미우미우는 이번 시즌에도 다채로운 드로즈 스타일링을 선보였다. 기존의 관능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젊음과 청춘을 상징하는 70년대 프레피 스타일로 변화한 것이 특징. 말끔한 화이트 셔츠와 봄버 재킷에 천연덕스럽게 매치한 드로즈는 오늘날 팬츠리스에 대한 현실적인 스타일링을 제시했다는 평이다. 미우미우를 이끄는 미우치아 프라다는 “서로 다른 요소를 엮어 낼수록 신선하고 다채로워진다”며 “옷을 잘못 입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스타일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미우미우 특유의 세계관을 드러냈다. 샤넬 역시 팬츠리스 트렌드에 동참하고 나섰다. ‘비상(飛翔)’을 주제로 한 이번 컬렉션에서 팬츠리스 룩을 내세우며 사회의 거추장스러운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한 여성들을 조명했다. 샤넬 앰버서더 제니는 비비드한 블루 니트 톱과 마이크로 쇼츠 차림의 팬츠리스 룩으로 쇼에 참석해 많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색다른 실루엣을 창조한 디자이너들도 있다. 매 시즌 테일러링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모색하는 코페르니가 선봉에 섰다. 날카롭고 섬세한 코페르니의 슈트는 바지 한쪽이 잘려 나간 듯한 비대칭의 원 레그 팬츠로 강렬하면서도 섹시한 인상을 남겼다. 루이비통 쇼의 대미를 장식한 A라인 미니드레스에 매치한 원 레그 팬츠는 이번 컬렉션의 메시지인 ‘대조와 조화’를 전달하는 핵심 요소다. 루이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매 시즌 미적 도전을 하지 않는다면 패션이라는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정형과 비정형의 충돌에서 오는 역설적 미학과 창조 정신을 강조했다. 팬츠에 모든 창의력을 쏟아 부은 듯한 컷 아웃 디테일 팬츠를 선보인 피터 도와 한쪽 소매를 과감히 자른 재킷과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길게 커팅한 팬츠로 색다른 슈트 실루엣을 연출한 빅토리아 베컴도 시선을 모았다.
팬츠와 스커트가 결합된 팬츠 스커트도 확실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구찌는 하늘하늘한 시스루 소재의 플리츠 장식 팬츠 스커트로 걸음걸이마다 드라마틱한 실루엣을 연출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에르메스도 팬츠와 스커트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반바지 위에 랩 스커트를 덧입은 것 같은 인상의 스커트 팬츠로 컬렉션을 구성했다. 보디라인을 따라 유려하게 흘러내린 스커트 팬츠는 치마인지 바지인지 입은 사람조차 분간이 가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끌로에는 봉긋한 페플럼 장식으로 스커트 효과를 톡톡히 낸 레이스 소재의 하렘 팬츠로 로맨틱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사카이는 종이접기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디테일의 스커트 팬츠를, 준야 와타나베는 구조적인 실루엣의 스커트 팬츠로 전형적인 바지 라인을 탈피하는 데 집중했다. 바닥을 쓸어 담을 정도로 긴 기장의 와이드 팬츠를 선보인 로에베와 가브리엘라 허스트도 팬츠의 다채로운 면면을 드러내며 선택지를 넓혔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트렌드 주기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오늘의 유행이 내일로 이어지리란 보장이 없는 불확실한 시대다.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뀐 것처럼, 패션계에 일고 있는 팬츠의 반란 역시 일시적 현상에 그칠지도 모른다. 이번 시즌 등장한 다양한 팬츠 중 어떤 스타일이 우위를 선점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더는 우리가 ‘바지’라는 기능적인 틀 안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불확실하다는 건 바꿔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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