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단독으로 삭감한 내년 예산안이 10일 국회 문턱을 넘었다. 야당이 여당과의 합의 없이 감액만 반영한 예산안이 본회의에서 처리된 건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다. 이에 따라 내년 정부 예산은 정부안보다 4조1000억 원 삭감된 673조3000억 원으로 확정됐다. 국민의힘은 “이재명 방탄용이자 국가 마비용 일방통행식 예산안”이라고 반발했다.
● 비상시 쓸 수 있는 예비비 절반 삭감
내년 예산안에서 가장 크게 삭감된 예산은 예비비다. 당초 정부는 4조8000억 원의 예비비를 편성했는데 야당은 이를 2조4000억 원 깎았다. 민주당은 “2023년 예비비 집행액이 1조3000억 원에 그친 점 등을 감안해 예비비를 감액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실과 검찰, 경찰, 감사원의 특수활동비, 특정업무경비도 전액 삭감됐다.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의 특수활동비 82억5100만 원을 비롯해 이들 기관 관련 특활비, 특경비 삭감 예산은 총 761억 원이다. 국고채 이자 상환 예산도 5000억 원 감액했다.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인 ‘대왕고래 프로젝트(동해 심해 석유·가스전 개발 사업)’는 8억 원가량만 남기고 497억2000만 원이 삭감됐다. 민주당은 “사업의 중장기 계획 및 타당성 평가가 부재하고 구체적인 자료 제출이 미흡했다”고 삭감 이유를 설명했다. 출연연구기관과 기초연구·양자·반도체·바이오 등 미래 성장동력 연구개발(R&D)도 815억 원 감액됐고, 용산공원조성 사업 예산도 229억 원 줄었다.
내년도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지원 예산도 감액을 피하지 못했다. 보건복지부 예산 중 ‘전공의 수련 환경 혁신 지원’ 항목으로 편성된 3089억1600만 원 중 756억7200만 원, ‘전공의 수련 수당 지급’ 예산 589억 원 중 174억4000만 원이 감액돼 본회의를 통과했다. 전공의 지원 관련 삭감 예산은 총 931억1200만 원이다. 정부와 여당은 “의료계가 요구해 온 전공의 지원 강화를 위해 꼭 필요한 예산”이라고 감액에 반대했지만, 야당은 “내년 상반기 전공의 복귀가 불투명하다”며 예산을 삭감했다.
야당이 ‘김건희 예산’으로 지목한 ‘전 국민 마음투자 지원사업’ 예산도 508억3000만 원에서 약 75억 원이 삭감됐다. 팬데믹 등을 대비한 mRNA(메신저리보핵산) 백신 개발 지원 예산도 약 36억 원이 깎였다.
● “내년 예산 집행 즉시 추경 편성 준비해야”
민주당과 정부·여당은 이날 본회의 직전까지 우원식 국회의장 주재로 협상을 이어갔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기획재정부는 민주당이 삭감한 예산 중 2조1000억 원의 복원을 요구하는 대신 ‘이재명표 예산’으로 불리는 지역사랑상품권을 포함한 9000억 원의 증액을 제안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삭감한 예산의 복원 규모에 맞게 민생예산을 더 증액해야 한다”고 맞서며 입장 차를 좁히지 못했다. 이에 국민의힘은 지역사랑상품권 예산 등을 포함해 3조4000억 원을 증액하자고 추가로 제안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 의장은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예산안이 통과된 직후 “민생과 경제 회복을 위해 증액이 필요한 예산은 추가경정예산(추경)으로 확충돼야 한다”며 “정부는 내년도 예산 집행이 시작되는 즉시 추경 편성 준비에 착수해 달라”고 밝혔다. 국회가 정부가 제출한 예산을 늘리거나 새로운 예산 항목을 만들려면 정부 동의를 받아야 한다. 야당은 정부 동의를 거치지 않기 위해 감액만 한 예산안을 본회의에 상정해 통과시켰다. 이를 두고 내수 진작 등을 위해선 예산 증액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당장 추경 편성에 나서라고 주문하고 나선 것이다. 이번 예산안 감액으로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정부안 대비 3조8000억 원 줄어드는 등 재정건전성이 다소 개선됐지만 추경 편성이 실제 이뤄지면 다시 적자가 늘어날 전망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통화정책은 원-달러 환율이 치솟으면서 발이 묶였고 남은 건 재정정책뿐”이라며 “정치 상황 탓에 내수 침체가 예상되는데 연말 대목을 앞두고 가장 큰 타격을 입고 있는 자영업자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상 처음으로 감액 예산안이 확정됐지만 일각에선 일단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 하나가 해소된 건 긍정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과정이 어찌됐든 예산안이 통과됐다는 점에서 불확실성이 하나 줄었다”고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