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에 관한 경고들은 이처럼 무시무시하지만 대부분 금방 잊어버립니다. 당장 우리에게 직접적인 손해를 입히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77년 뒤 지구와 인류를 위해 일회용 플라스틱을 줄이기보다 지금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저렴하고 편리한 선택을 하는 게 합리적이라 여겨집니다.
약 30년 전부터 ‘환경보호’를 외쳐왔던 배우가 있습니다. 1996년 데뷔 후 영화 14편, 드라마 27편에 출연하며 탄탄한 커리어를 이어온 다작(多作) 배우 박진희(46)입니다. 유명세만큼이나 인터뷰 요청도 많았던 그는 관심사를 물어올 때마다 “환경 문제”라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시 기자들은 의아했을 겁니다. 그때만 해도 환경보호에 관한 담론은 생소하고 낯설었을 테니까요.
박진희가 28년 차 배우가 된 2024년, 환경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문제가 됐습니다. 심각했지만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여 온 탓에 기후 위기는 우리의 미래뿐 아니라 현재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같은 목소리를 내온 박진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비교적 최근입니다. 그가 말하고 실천해 온 것들이 이제서야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가 된 걸까요. 최근에는 환경운동가로 더 많이 호명되는 배우 박진희를 〈브렉퍼스트〉가 만났습니다.
엄격했던 20대 ‘운동가’, 깨달음 준 팬의 메시지
박진희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어머니의 영향이 컸습니다. 소녀 같은 심성을 가진 어머니는 누구보다 계절의 변화를 세심하게 느꼈다고 합니다. 거리의 식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예뻐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그의 마음엔 어려서부터 자연이 깃들어왔습니다.
“엄마의 말과 행동이 ‘자연은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마음을 심어줬어요.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니 지켜야 한다는 마음도 갖게 된 거죠.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담임 선생님이 ‘너희 나중에 물을 사 먹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어린 마음에 수도꼭지만 틀면 나오는 물을 왜 사 먹냐고 생각했는데 이젠 물을 사 먹잖아요.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환경이 정말 급변하고 있구나 깨닫게 됐어요.”
지금은 소셜테이너(Socialtainer·사회 문제에 발언하는 연예인), 폴리테이너(Politainer·정치적 의견 표명을 하는 연예인)처럼 정치·사회적 문제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이나 의견을 표명하는 연예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20대 초반 박진희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만 해도 젊은 여자 배우가 사회 문제에 대해 자기 의견이나 소신을 표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환경 문제는 사회적으로도 낯선 화두였고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더라도)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기에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오히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따라주지 않거나 틀렸다고 지적하면 욱하기도 했죠. 그땐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나이였어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그는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타인도 함께 환경 운동에 동참해 주길 바랐습니다. 당시 박진희 일정을 따라다니는 스태프들 사이에선 ‘5층 이하는 무조건 계단 이용하기’라는 암묵적 룰이 있었다는데요.
스케줄이 빡빡해 들고 다녀야 했던 짐이 많았음에도 박진희와 스태프들은 짐을 잔뜩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면 현장 스태프들에겐 텀블러를 선물하면서 절대 일회용 컵을 쓰지 말자고 다짐을 받았답니다.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기 위해 샴푸를 사용하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비누 형태의 샴푸 바 같은 친환경 제품이 많이 나오지만 그때만 해도 샴푸는 플라스틱 용기 안에 든 액체 형태로밖에 판매하지 않았습니다. 플라스틱 용기에 든 샴푸를 사용하지 않으려 밀가루로 감아보고 린스 대용으로 식초를 사용하고 직접 양잿물까지 만들었습니다. 한동안은 아예 샴푸를 쓰지 말자고 해서 ‘노푸’(No Poo·샴푸 사용을 거부하는 행위)를 해본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까지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촬영 때문에 머리에 제품을 많이 발랐는데 샴푸를 사용하지 않으니 헤어 디자이너들이 너무 힘들어했죠. ‘언니, 제발 샴푸로 머리 감으면 안 되냐’면서요. 지속 가능한 방식이 아니었어요. 결국 다시 샴푸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죠.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신념을 갖고 최선을 다했지만 완벽할 수 없었어요.”
그가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SNS에 ‘일회용 컵 쓰지 말고 텀블러를 사용하자’는 게시글을 올렸는데, 그 글을 본 팬에게 메시지가 온 겁니다.
저희 부모님은 영세한 종이컵 공장을 운영하고 있어요. 지구를 위해서 종이컵을 안 써야 한다는 건 알지만 종이컵이 팔리지 않으면 저희 집은 힘들어져요.
“그때 정말 제가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어요. 한 면만 봤고, 이게 옳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만 달렸던 거예요. 다른 면을 보지 못하고요. 그런데 환경 문제는 다각도로 생각해야 하는 문제예요. 장점과 단점, 개인의 선택, 이해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옳으니까 이 방향으로 가야 해’라고만 생각했던 거예요. 그 메시지를 받은 이후로 많이 바뀌었어요. 내가 옳다고 생각해도 남들이 불편해할 수 있고, 아니면 나와 같지 않은 의견을 가질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됐어요.”
두 아이의 탄생…다시 ‘열혈 운동가’로
올해 마흔여덟 살이 된 그는 11살, 7살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30대 후반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네 살 터울의 두 아이를 낳으면서 환경운동가로서 그의 삶에도 변곡점이 찾아왔습니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다시 (환경운동을) 열심히 해야겠구나’ 결심했어요. 저는 사랑도 해봤고 결혼도 해봤고 아이도 낳아봤는데, 이제 태어난 이 아이가 살아갈 환경은 건강하지 못한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건강한 공기를 마시고 건강한 물을 마시고 식재료를 먹으며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이전보다 더 간절해졌어요.”
그가 환경운동을 한다고 해서 거창한 활동을 하는 건 아닙니다. 친환경적인 일상을 살고, 삶의 방식을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하려고 노력합니다. 플라스틱 칫솔 대신 대나무 칫솔을, 치약 대신 죽염을,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액체 샴푸 대신 종이 포장지로 감싼 샴푸 바를 사용하는 식이죠.
환경 문제에 관해선 다소 유난스러운 엄마지만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엄마의 삶과 가치관을 보고 배우는 중입니다. 어린 박진희가 자연을 소중히 여기던 어머니의 마음을 닮았던 것처럼요.
“하루는 둘째가 집 앞에서 개구리를 잡아 왔어요. 그걸 보고 첫째가 뭐라고 하더라고요. ‘동물을 함부로 잡아 오면 어떡하냐. 누가 너를 잡아다가 그 사람 집에 데려가 살면 좋겠냐’면서요. 속으로 뿌듯했어요. 제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누나가 동생에게 환경 교육을 하고 있으니까요.(웃음)”
아이들도 자기만의 삶과 가치관이 있는데 엄마의 방식을 강요받는 건 아닐까. 아직은 자기 의견을 갖기 어려운 어린 자녀에게 자기 생각과 신념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건 아닐지 우려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고민은 기우(杞憂)였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하루는 첫째 아이가 수영장 간대서 샴푸 바를 넣어서 보내줬어요. 그랬더니 친구들이 관심을 갖더래요. 아이가 ‘우리 엄마는 환경에 관심 있어서 우리 집은 항상 이걸 쓴다’고 말하자 아이들이 너무 훌륭하다고 칭찬했다면서 집에 와 자랑하더라고요. ‘나도 모르는 곳에서 많은 것들이 변하는구나’란 생각이 들어 힘을 얻어요.”
‘바뀌지 않는다’는 무력감 들어낸 머릿속 한 마디
수많은 개개인의 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위기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올 초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의 기온은 이미 1.5도를 넘어섰고, 현재 추세대로라면 2020년대 말엔 2도를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오랫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막아낼 수 없는 현실을 지켜보며 얼마 전 그는 ‘기후우울증’에 걸렸다고 합니다. 기후우울증은 2017년 미국 심리학회가 정의한 우울장애의 일종으로, 기후변화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 무력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증상을 일컫습니다.
단순히 자연재해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기후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 환경을 망가뜨린 인간에 대한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을 포함하죠. 30여 년 넘게 일상에서 친환경적인 삶을 실천하며 살아왔지만, 기후 위기로 인한 재앙을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인 겁니다.
“지구의 평균 온도가 2도 오르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과학자들은 지금 1.5도 정도 올랐다고 보는데, 지금부터 전 세계의 모든 공장이 문을 닫고 차도 타지 않고 집에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0.5도는 오를 거라고 해요. 저라는 개인이 바꿀 수 있는 건 없다는 무력감에 빠졌어요.”
심장이 떨리는 불안 증세가 지속됐고 불면증도 앓았습니다.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랬던 그가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지난 세월 일상에서 환경 운동을 하며 느꼈던 무력감과 좌절, 비관을 극복한 방법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만둘 거야?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늘 그랬듯이. 그렇게 물었을 때 언제나처럼 ‘그건 아니다’라는 대답이 나왔어요. 그래, 그만둘 거 아니면 우울해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제 결론은 같았어요.”
예전엔 마냥 쑥스러웠던 ‘환경운동가’라는 호칭도 이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무력감과 우울에 빠지기보다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요.
환경운동가로서 그의 행보는 이전보다 더 바빠졌다고 합니다. 최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제28차 세계한인경제인대회’ 개막식에서 ‘기후변화와 환경보호’를 주제로 기조 강연을 했고요,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친환경적인 생활 방식을 소개하고 여러 강연의 연사로 참여해 환경 문제에 대해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발언합니다.
“과거엔 저보다 훨씬 열심히 하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환경운동가랍시고 자리를 차지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발을 뺐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비겁한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제대로 하기 두려우니까 발만 담가놓고 숨었던 것이 아니었나. 이젠 배우보다 환경운동가로 더 많이 불리는 만큼 제대로 공부하고 행동하고 실천할 거예요. 사람들, 그리고 제 아이들 앞에 환경운동가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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