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런데 요즘만큼 대답하기 어려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엄마, 계엄이 정확히 뭐야?” “대통령은 왜 그걸 선포한 거야?” “탄핵은 또 뭐야?” 아이가 정치를 묻기 시작했다.
답하는 게 고생스럽긴 해도 아이가 시사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이 한편 기특하기도 하다. 놀라운 건 이런 게 비단 우리 아이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초등학교 6학년인 큰아이 말에 따르면 요즘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많은 아이들이 대통령, 계엄, 탄핵 등 요즘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단순히 소식만 나누는 게 아니라 누가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판단하기도 하고 서로 간에 토론도 한다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기자가 되기 전까지 정치 현안이나 시사 이슈에 대해 잘 모르는 소위 ‘정치 잘알못(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 중엔 애초 기자를 꿈꾸며 관련 학과와 모임을 거치고 학생회, 시민단체, 심지어 정당 활동을 하다가 들어온 이도 있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아마 1990년대 후반 이후 학교에 다닌 학생 대다수는 비슷할 것이다. 교실에서 정치 문제를 접하거나 관련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학교에서 선생님 혹은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되짚어 봐도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왕조시대에도 나라님 흉은 봤다는데,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정치 이야기가 활발한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유독 교정만 청정지대다.
왜? 잘못 꺼냈다간 번거로운 일에 휘말리기 십상이었던 탓이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게 소위 ‘정치 편향적 발언’을 한 교사가 학부모나 아이의 신고로 시도교육청의 감사와 징계를 받았다는 뉴스다. 교사들은 교육자이자 공직자의 한 명으로서 엄격한 정치적 중립성을 요구받는다. 헌법에서 정치적 중립성은 ‘보장’되어야 할 권리에 가까운 데 반해 교육기본법에서 정치적 중립성은 ‘지켜야’ 하는 의무다. 잘못해 이를 어겼다가는 누군가로부터 신고를 당하고 괜한 고생을 자초하게 된다.
물론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은 중요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한쪽의 일방적 주장만 옳다고 가르치거나 더 나아가 진실을 왜곡하면 자질미달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저 정치적 소재를 화두 삼았다거나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특정한 입장이 피력된 것까지 정치 편향이라고 봐야 할까. 편향 사례라고 해서 보면 수업 중 특정 정치적 사건이나 인물을 예시로 삼았다거나 특정 언론의 자료를 보여준 것에 불과할 때가 적지 않다. 잣대가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학교에선 갈등과 충돌 없을 것만 가르치고, 교실에선 정치적, 시사적으로 예민한 소재들이 사라졌다.
사실 굳이 학교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요즘 정치 이슈를 접할 수 있는 창구는 무궁무진하다. 우리 아이와 그 친구들도 TV, 휴대전화, 컴퓨터,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고 들었을 것이다. 요즘은 정치 이슈를 상세히 설명하는 SNS 영상과 채널도 많다.
그런데 이런 루트로 정치 이슈를 접하는 것엔 문제가 있다. 편견이 생기기 쉽다는 점이다. 뉴스의 출처마다 성격이 다양한데 어떤 출처를 볼지 선택하는 데도 의사가 반영되고 더욱이 요즘 아이들이 많이 이용하는 SNS의 경우 알고리즘을 통해 비슷한 것만 골라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 곁엔 비슷한 콘텐츠만 보다가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도 있지 않나.
어차피 어디나 편견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면 그나마 정제된 공간인 학교에서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대면 교육장에선 쌍방 소통이 가능하기에 궁금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을 묻고 조율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에겐 무엇보다 이런 훈련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능력인 탓이다. 이슈가 터질 때마다 일반 시민은 물론 정치인까지 와르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광장정치는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측면에서 선진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매우 후진적인 정치의 단면이다. 문제가 생기면 이해 당사자 간에 원만한 토론과 숙의, 사회 공감대 형성, 그리고 합의로 풀어야 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첨예한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문제를 거리로 들고 나온다. 그리곤 각자 정부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서로 대화하는 대신.
어릴 때부터 민감한 정치·사회적 이슈를 두고 토론하고 숙의해서 문제를 푸는 연습을 했다면 좀 다르지 않았을까. 매년 열리는 국정감사나 국회 현안질의를 지켜보면, 이런 일에 통달해 있어야 할 정치인들부터 얼마나 부족한지 여실히 볼 수 있다. 맥락에 닿지 않는 진행, 내 할 말만 하겠단 식의 질의, 답답하면 다짜고짜 내지르는 고성 등은 몇 년째 보기 민망할 정도다.
미국에서 잠시 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유창하지 않은 영어 때문에 곤혹스러운 순간이 많았는데 그중 가장 곤혹스러웠던 시간을 꼽으라면 단연 발표나 토론 수업을 할 때였다. 그런 수업이 정말 잦았는데 이를테면 역사 시간에 자유무역주의자와 보호무역주의자로 나뉘어 토론을 해보는 식이었다. 당장 돌아가는 정치, 사회 현안과 관련한 토론들도 많았다. 어릴 땐 그 시간이 너무 무섭고 부담스러워서 도망치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무척 부러운 수업 문화다. 우리 학생들은 그만큼 토론하고 고민하고 조율할 기회를 갖고 있을까.
한국에서 정치 논의는 자주 금기 취급된다. 비단 학교뿐 아니다. 기사 거리 탐색을 위해 종종 들르는 온라인 카페 중에 자칭 ‘클린 카페’라는 곳들이 있다. 정치적 이슈를 이야기할 수 없는 곳이기에 정치 청정지역, 클린 카페라는 것이다. 정치가 더러운 것인가. 찬반이 첨예한 소재를 잘 다루지 못하는 탓에 서로 싸우고 비방해서 그렇지 정치 자체는 지저분한 것이 아니다. 세상만사가 정치다. 조율하고 합의해 가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치의 핵심을 ‘중용’이라 하지 않았나.
불행한 사건으로나마 어린아이들이 현 시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니 반가운 일이다. 교원 단체에 따르면 요즘 학교에서 정치 현안에 대해 묻고 궁금해 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더 많은 아이들이 관심 갖고 토론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나처럼 내내 정치라곤 모르고 살다가 스무 살 넘어서 갑자기 대선부터 맞닥뜨리는 그런 일은 겪지 않도록 말이다. 그게 민주주의의 기초 체력을 키우는 일이고 또 한 번의 12월 사태를 막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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