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쓰고 펜싱 칼 잡고 상대와 겨루다 보면 머리에 칼을 맞을 때 ‘땅’하는 소리, 칼이 맞닿을 때는 ‘쨍’하는 소리가 아주 매력적이에요. 마치 제가 영화에 나오는 칼잡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공격해 목표 지점을 찌를 때의 기분도 짜릿하죠. 그리고 제가 평소 생각이 많은 편이라 머리가 복잡한데 펜싱하면 1시간 동안에 딱 이것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영상 프로덕션 PD로 일하며 동국대 영상대학원 영화영상제작학과를 다니는 박수지 씨(31)는 올 4월 W-펜싱클럽을 찾아 칼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평소 스포츠 관람을 즐기고 직접 해보는 것도 좋아했던 그가 올림픽 때마다 펜싱을 보며 ‘한번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과거 필라테스도 했고 4년 전부터 풋살을 즐겼던 그에게 펜싱은 새로운 묘미를 줬다. “오직 나만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풋살은 5명이 플레이하다 보니 공격 및 수비 상황에서 제가 실수를 하면 팀에 해를 끼치게 되잖아요. 반대로 제가 잘하면 팀에 도움이 되고…. 한마디로 팀워크가 중요한 스포츠입니다. 공의 위치에 따라 다소 여유를 찾을 수도 있죠. 그런데 펜싱은 오직 저에게만 집중하며 상대와 겨뤄야 합니다.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전후 스텝을 오가며 칼을 휘두르다 보면 1시간이 금세 지나갑니다.”
박 씨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저녁 1시간씩 펜싱을 하고 있다. 배우는 종목은 사브르. 팔과 머리를 포함 상체를 찌르고 벨 수 있는 종목이다. 엘리트 선수 출신인 원남영 대표(40)의 지도를 받고 있다. 원 대표는 2012년 런던 올림픽 펜싱 사브르 남자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인 원우영 대표팀 코치(42)의 동생이다. 원 코치는 8월 파리 올림픽 펜싱 사브르 개인과 단체전을 석권한 남자 대표팀을 지도했다. 사브르는 한국이 올림픽 무대에서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 국내 마스터스들에게도 인기다.
박 씨는 건강 및 취미를 위해 펜싱을 시작했지만 다이어트 및 균형 잡힌 몸매를 만들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많다. 펜싱의 운동량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원남영 대표는 “1시간 운동하면 700~800칼로리는 소비한다”고 했다. 이는 53kg인 사람이 시속 12km로 1시간 달릴 때 소비하는 에너지(678칼로리)보다 많다. 박 씨는 “풋살할 때 보통 2시간 하는데 펜싱 1시간이 더 힘들다”고 했다. 풋살도 계속 쉬지 않고 할 경우 30분에 300~500칼로리를 소모해 운동 강도가 높다.
펜싱의 기본자세는 앙가르드(공격이나 수비를 동시에 준비하기 위해 선수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자세). 뒷발이 측면, 앞발이 전방을 향한 상태에서 양발을 어깨너비 정도로 벌리고 칼을 전방으로 향해 든다. 이 상태로 전진(마르쉐)과 후퇴(롱빼)를 반복하다 앞발을 앞으로 굽히며 공격(팡트)한다. 공격 동작이 ‘런지’를 닮아 영어권에선 런지라고 하기도 한다.
전진할 때나 후퇴할 때 양발이 교차하면 안 된다. 전진할 땐 앞발이 먼저, 후퇴할 땐 뒷발이 먼저 움직인다. 초보자들은 이 동작을 반복해 숙달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이 자세를 익히기 위해 앙가르드 자세로 1시간 서 있기도 한다. 이 동작이 제대로 돼야 칼을 잡을 수 있다. 이 때문에 펜싱장에선 약 18m 피스트(경기장·경기 공간은 14m) 위를 앞뒤로 오가는 운동을 가장 많이 시킨다. 운동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 박 씨도 펜싱한 뒤 몸이 더 가벼워졌다고 했다.
최근 국내 펜싱 동호인 인구가 최근 빠르게 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전국에 펜싱클럽이 2, 3개뿐이었지만 현재는 100개가 넘는다. 동호인 상대 대회도 많이 늘었다. 원남영 대표는 “대한민국이 올림픽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졌다. 체력 향상과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한국 펜싱은 2012년 런던 올림픽부터 계속 금메달을 획득하고 있다. 특히 사브르는 2012년 런던 올림픽 때 남자 단체전 및 여자 개인전 금메달, 2021년 열린 도쿄 올림픽 남자 단체전 금메달, 그리고 올 파리 올림픽에서 남자 단체 및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취미 활동 및 동호인 대회 참가를 목적으로 펜싱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일부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진학을 위해 펜싱을 시키기도 한다. 펜싱을 잘하면 해외 명문대에 갈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미국 뉴욕타임스는 ‘아이비리그 합격에 유리하다고 알려져 맨해튼에 있는 펜싱 학원은 명문대 펜싱 전형을 노리는 부모들이 연간 수만 달러의 학원비에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박 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해 기승을 부리던 2021년엔 풋살을 시작했다. 고교 시절부터 좋아했던 손흥민(토트넘)을 따라 해 보고 싶어 시작했다. JN스포츠란 여성 풋살팀에서 시작했고, 지금은 윌브 FC에서 뛰고 있다. 그는 “코로나19 시절이라 마스크를 쓰고 축구했지만 재밌었다. 공을 다루고, 동료들과 협력 플레이로 골을 잡아내는 즐거움이 있었다”고 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TV 프로그램 ‘골때리는 그녀들’보다 빨리 시작했다. 지금이야 여성 축구인들이 많이 늘었지만 그땐 드물었다. 현재는 펜싱에 집중하면서 가끔 풋살도 즐기기도 한다. 영상 제작을 전문으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풋살팀 홍보 영상을 찍어서 제공하기도 했다. 현재 다양한 영상을 제작하고 있는데 향후 스포츠 관련 영상도 제작할 계획이다.
펜싱의 매력은 무엇일까? “칼로 상대를 찌르거나 배는 공격(팡트) 만큼이나 상대 공격을 막아내는 수비(파라드)도 재밌어요. 상대의 칼을 여러 동작으로 옆으로 쳐 내거든요. 공수를 다 잘해야 합니다.”
“펜싱을 배우기 전에는 플레이 전개가 워낙 빨라 어떤 기술로 포인트를 땄는지 해설위원이 설명해도 잘 몰랐죠. 펜싱을 배운 뒤 파리 올림픽을 봤을 땐 그래도 해설위원이 설명하는 게 뭔지는 알게 됐죠. 보는 재미가 훨씬 좋았어요. 무엇보다 사브르 남자 2관왕 오상욱, 사브르 여자 단체전 은메달 윤지수를 보며 정말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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