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리고 왜 쓴 것일까. 바다쪽을 바라보는 신전의 하얀 대리석 네번째 기둥의 좌대에 단정히 새겨진 영문 인쇄체, 「Byron」.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대 시인 바이런은 영국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에 살고 있었다.
아티카 반도의 최남단 수우니온 곶의 절벽에 세워진 포세이돈 신전에는 이렇게 고대 그리스인들이 바다의 수호신이라고 믿었던 포세이돈 신과 함께 시인 바이런의 이름이 간직되어 있다. 그리스를 노래한 그의 아름다운 시편들 때문이었을까. 그리스에서 마감한 36년의 그 파란만장한 생애 때문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으리라. 그렇기 위해서는 문학이 민족보다 훨씬 고귀한 이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바이런의 문학은 그리스와 매우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당대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문학의 배경이 된 고대 그리스 고전과 신화는 말할 것 없고 그리스를 소재로하여 쓴 많은 시편들이 그렇다. 그는 「아나크레온의 슬픈 사랑」을 노래했고 아테네의 소녀에게 사랑을 바쳤으며 (아테네의 소녀여 우리 사랑하기 전에) 그리스와 터키(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오늘날의 다다넬즈 해협을 헤엄쳐 건넌 후 그것을 시로 쓰기도 하였다(세스토스에서 아비도스까지 헤엄쳐 건너간 후의 시).
아침에 깨어 신문을 보니 자신이 하룻밤 사이에 유명인사가 되어 있더라는 그의 대표작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 역시 그 많은 이국 순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이 연작시의 첫행은 「오오 그대, 헬라스(그리스)에서 신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뮤즈여, …오랫동안 인적 끊긴 델피(델포이)신전에서 한숨도 쉬었노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바이런이 그리스를 울렸던 것은 시와 행동으로 보여준 그의 그리스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었다. 그는 오스만 터키의 압제 아래 있었던 그리스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는 시들(연작시 「돈후안」 제3부의 「그리스의 섬들」·1821)을 많이 썼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그것을 마침내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당시 살고 있던 이탈리아의 제노아 항을 출발하여 그리스의 마솔롱기에 상륙한 것이 1823년, 그는 곧바로 터키에 항전하는 대열에 서지만 불행하게도 1년이 채 못되어서 병사하고 만다. 그가 임종시에 남긴 마지막 말은 「전진! 전진! 나를 따르라. 겁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당시 그리스 민중의 바이런에 대한 존경심은 후에 독립될 그리스의 왕위를 거론했을 정도라고 한다.
사실 「바이런」이라는 이름이 포세이돈 신전의 기둥에 새겨진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 우리가 익히 보았듯이 트로이전쟁에서 포세이돈 신은 고난에 처할때마다 항상 바람처럼 나타나 그리스 군의 사기를 고취, 승리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 발칸반도를 지배하던 강국, 오스만 터키와 힘겹게 싸워독립을쟁취하고자 했던 그리스인들의 고난은 포세이돈의 도움을 필요로했던 트로이전쟁의 그것과 비유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한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바다 건너 멀리 달려온 바이런은 마치 포세이돈같이 고마운 존재로 여겨지지는 않았을까. 바이런 역시 같은 심정이었던 듯 유언처럼 「수우니온의 대리석(포세이돈신전·필자 주)절벽 위로 나를 데려가다오/거기서는 파도와 나뿐/어느 누구도 우리 서로 속삭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거기서 백조처럼 노래부르고 죽게 해다오/노예들의 나라는 결코 내 나라가 될 수 없으리니…」(이정호 역)라고 그의 그리스인의 애국심을 고취한 시 「그리스의 섬들」에서 읊고 있다.
포세이돈 신전에 새겨진 그 이름 「바이런」은 결국 그의 유언이자 자유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 믿음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신전은 허물어져 15개의 하얀 대리석 기둥만을 남겼으나 그의 그와같은 신념은 에게해의 푸른 파도소리처럼 영원히 우리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오세영(서울대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