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사망한 중국의 彭眞(팽진)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은 혁명 제1세대의 개국공신으로 최고원로이자 급격한 경제개혁에 반대해온 강경보수파의 거두였다.
그의 사망은 개혁개방정책에 제동을 걸어온 전통적 공산주의 세력의 대부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그가 비록 상징적이기는 하나 보수파의 최고리더로서 나름대로 역할을 해온 점을 감안하면 향후 江澤民(강택민)주석을 핵심으로 한 집권층의 입지가 보다 탄탄해지고 개혁개방정책도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예상된다.
『동풍(사회주의)이 서풍(자본주의)을 압도한다』며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해온 팽은 은퇴후에도 휠체어를 탄 채 전국 각지를 돌며 의견을 제시, 鄧小平(등소평) 다음으로 권위있는 원로 역할을 해왔다. 중국의 8대원로는 이제 楊尙昆(양상곤·90) 薄一波(박일파·89) 萬里(만리·81) 宋平(송평·80) 등 4명만 남게 됐다. 팽의 죽음으로 원로세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세대교체가 보다 빨라질 것이다. 산서성의 빈농 출신인 팽은 21세때 공산당 청년단체에 들어가 산서 하북 내몽고 지역을 무대로 지하혁명운동을 하며 두차례 투옥되는 등 투사의 길을 걸었다. 49년 공산정권수립 후 당비서가 됐고 51년부터 17년간 북경시장과 당서기를 역임하면서 북경 및 북부지역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왔다. 劉少奇(유소기)전국가주석과 막역한 사이였던 그는 문화대혁명 때 정치배반자로 낙인 찍혀 모든 직책에서 쫓겨나는등 핍박을 받았다.
江靑(강청) 등 4인방이 몰락하고 毛澤東(모택동) 사후인 79년 당정치국원으로 복권돼 권력핵심에 다시 진입했으며 83년에 전인대위원장, 84년에 당정법위원회 서기를 겸임하며 개혁개방시대 초기의 법률제정 등 전인대를 실질적으로 장악해왔다. 팽은 이때 전인대를 배경으로 등소평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팽은 87년 제13차 당대회에서 등에 의해 다른 원로들과 함께 현직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그는 89년 천안문사태 당시 군에 의한 강경진압을 지지하고 胡耀邦(호요방) 趙紫陽(조자양)전총서기 등 개혁파의 실각에 간여하는 등 은퇴 후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북경〓황의봉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