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이어령/아시아의 시대와 가라오케문화

  • 입력 1997년 4월 27일 20시 08분


근대화 이후 동풍이 서풍을 제압한 문화는 흔치 않다. 그 흔치 않은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라오케 문화」다. 서양사람들은 「가라오케」 역시 무슨 라틴말에서 나온 자기네들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빈 것을 뜻하는 일본말의 「가라」(空·공)와 관현악단을 의미하는 영어의 오케스트라를 합친 튀기 말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널리 퍼지게 된 비결▼ 가라오케는 1973년 일본의 지방도시 나고야에 있는 한 레코드 상(飛失 久)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방송계에서 널리 사용돼 왔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누가 언제 어디서 맨처음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지구의 한 문화형상으로 그렇게 널리 퍼지게 된 인기가 무엇이냐를 밝히는 일이다. 그 발생지인 일본에서는 도시의 성년인구 35%가 한 주 동안 10만회 이상 가라오케 집을 드나든다. 경제적으로도 가라오케는 하드 소프트의 판매액만 연간 수조(兆)엔에 달하는 거대 오락산업이다. 일본 문화라고 하면 두드러기가 생기는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비록 그 명칭을 바꾸기는 했어도 전국의 노래방수만 해도 3만개가 넘고 가라오케 술집 역시 줄잡아 1만3천개 이상이다. 아시아의 맏형인 중국, 코카 콜라까지도 구가구락(口可口樂)으로 중화화(中華化)하는 중국이지만 가라오케만은 「가라」는 간자체 그리고 「오케」는 영자 그대로 OK라고 표기한다. 가라오케 집에서 하룻밤 지새며 노래를 부르는 요금이 공장노동자의 한달 분 수입과 맞먹는다는데도 그 수요는 폭발적이라고 한다. 홍콩 싱가포르에서는 가라오케 클럽이나 식당에 그 장비를 차려놓은 곳이 6만개에 이르는데 그것은 미국대륙 전체수의 배에 해당하는 숫자다. 유럽처럼 문화의 공통성이 없어 아시아에는 유럽연합(EU)형태의 블록국가가 생겨나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확실히 가라오케 현상을 놓고 관찰해보면 분명 무엇인가 아시아에는 공통의 문화가 생겨나고 있는 것같은 생각이 든다. 21세기에는 아시아의 시대가 오리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들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경제적인 성장만을 두고 하는 소리다. 어떤 공동의 문화가 없이는 아시아의 시대란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시아를 주축으로 지구촌에 퍼져가는 가라오케 현상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인기의 비밀은 어디에서 오고 있는 것인가. 그것을 분석해보면 우리는 의외로 중대한 새 문명의 물결의 암호를 읽을 수 있다. 한마디로 가라오케는 「듣는 문화」를 「부르는 문화」로 음악의 풍토를 바꿔놓은 데 그 혁명성이 있다. 남이 부르는 노래를 듣기만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음악 대중의 출현이다. ▼소비자가 생산자로▼ 가라오케를 경제적 패러다임으로 바꿔 보면 소비자가 생산자에 참여하는 이른바 「프로슈머」(프로듀서와 컨슈머를 합쳐놓은 합성어)의 새물결을 반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기술의 패러다임으로 보면 그것은 또한 기계와 인간의 친화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가수 한사람의 판에 찍힌 노래를 만인이 듣고 있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스튜디오에서 생산되는 하나의 노래가 아니라 1백사람이 부르면 1백가지로 다르게 재생산 되는 노래방의 노래 시대다. 프로가 대중으로 변하고 대중이 프로로 변하고 발신자가 수신자로, 수신자가 발신자로 역할을 바꾼다. 그리고 생산과 소비의 담과 통치와 피통치의 구렁이 메워진다. 이러한 변화와 문명의 새물결이 아시아에서부터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우리 국회 청문회의 가라오케 점수가 몇 점이나 되는지 더욱 궁금해진다. 이어령<이화여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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