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개국에서 2백여편의 작품이 들어온 부산국제영화제. 소재도 주제도 다채롭고 풍성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도드라지는 주제는 중국 역사 1백년이다. 대작 「아편전쟁」부터 홍콩 귀속을 다룬 개막 작품 「차이니즈 박스」까지.
서울에서도 곧 개봉될 「차이니즈 박스」는 향기나는 조차지 홍콩(香港)의 오늘이 화면을 메운다.
항구의 연기, 촘촘한 아파트숲, 손에 잡힐 듯한 항공기. 애수 어린 높은 음과 환청처럼 들리는 타악기 소리가 인상적이다.
영국 저널리스트 존(제레미 아이언스)과 그가 짝사랑하는 비비안(궁리),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중국 본토 사업가 창. 다소 도식적인 이 관계에서 궁리는 자존심 강한 창녀, 곧 홍콩을 상징한다.
배를 잘린 물고기의 벌건 심장이 여전히 펄떡펄떡 뛰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웨인 왕감독은 이를 『홍콩이 중국으로 귀속된 뒤에도 영국의 영향은 계속되리라는 의미』라고 밝혔다. 홍콩 태생 뉴요커인 그에게 홍콩 반환은 「상실」인 셈이다.
「아편전쟁」(16일 부산 부영극장)은 중국영화사상 최고액인 1천5백만달러를 투자한 작품. 1839년 아편을 뿌리뽑기 위해 고초를 무릅쓰는 린 저쉬를 중심으로 중국의 패전과 남경조약을 다뤘다. 1백년을 숨겨온 중국인의 복수심인가. 광저우 강변에서 린 저쉬가 2만 상자의 아편을 불태우는 장면은 장엄한 압권이다.
두 영화 사이의 세월을 다룬 작품에는 중국 여성감독 안휘의 자전적 영화 「객도추한」이 있다.
일본인 어머니와 중국인 딸의 갈등과 화해를 담은 이 작품에 깔려있는 것은 일본의 만주침략이다. 만주에서 결혼할 때 중국어를 못해 따돌림 당한 어머니를 보며 자란 딸. 정작 딸은 어머니의 고향 일본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도둑으로 몰리게 되자 비로소 어머니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안휘 감독의 또다른 출품작인 「반생련」(폐막작품·18일 해운대무대)은 이번 영화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30년대 상하이의 가을 거리를 배경으로 오랜만에 재회하는 연인들의 비애와 운명을 그린 멜로물.
가난한 집안살림을 연인에게 떠넘기기 싫었던 만젠이 졸부에게 겁탈당한 후 애인과 헤어져 살아온 절절한 반생이 스며있다. 역사성은 떨어지지만 절제된 가운데서도 화려한, 비극적이면서도 우아한 영상미 속에 중년 여성감독 특유의 철학이 배어난다.
이밖에도 개방화 이후의 중국을 엿볼 수 있는 「매복」, 로카르노영화제 수상작 「메이드 인 홍콩」, 왕자웨이 감독의 「아비정전」, 홍콩 노동자계층을 다룬 코미디 「오가기」(17일 부산극장) 등이 볼만한 작품들이다.
〈부산〓권기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