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났던 선조들]중앙아시아·러시아

  • 입력 1998년 1월 7일 09시 12분


카자흐 알마티에 사는 최 루드밀라씨(60·여)는 37년 강제이주 이듬해 악튜빈스크에서 태어났다. 기술대학을 나와 제도사로 일하다 5년전 은퇴, 국가연금으로 살고 있다. 틈틈이 질료니바자르(야채시장)나 바라호카(중고품시장)에 나가 컨테이너 상점을 경영하는 고려인(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은 자신들을 이렇게 부른다)들과 정담을 나누는 것이 큰 즐거움. 어린 시절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아들은 서울대 국문학과에 유학중이고 자신은 고려일보나 알마티에서 주 4회 방송되는 한국어방송을 통해 고려인들이나 한국 소식 등을 보고 듣는다. 연해주에 살던 그의 부모는 이주 직후 참혹한 상황에서 새 터전을 일궈나갔다. 내륙인 중앙아시아의 기온은 여름에 영상 40도, 겨울엔 영하 35도를 오르내린다. 최씨가 태어날 무렵 고려인 영아 사망률은 50%를 넘어섰다. 박토에는 거름성분이 거의 없어 그의 가족은 모래황무지에 물길을 내고 멀리서 차진 흙을 차로 실어와 뿌리고 나서야 농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의 한인들에게 친일성향이 있다며 강제이주를 강행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근면한 이들의 노동력을 이용, 중앙아시아의 버려진 땅들을 일궈보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모스크바대 아시아태평양지역 연구소 이창주교수는 소련 와해 후 공개된 강제이주 관련 비밀문건들을 엮어 지난해 책으로 내놓았다. 이 책에 담긴 공산당의 이주명령서와 강제이주 초기 고려인 탄원서 등은 당시 고려인들의 피맺힌 사연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발하슈호 굽차이촌으로 끌려간 ‘콜호스회장 김씨’는 “이주도중 어린 아들이 숨진데다 딸 또한 열차에서 헤어져 아랄해 쪽으로 가버렸다”며 “아직 지급되지 않은 이주보상금 5백루블만 내준다면 딸을 찾아보겠다”고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 크질오르다로 끌려간 김경석씨는 “그 많던 식량을 연해주에 두고 왔는데 여기서는 1㎏의 알곡도 보상받지 못했다”고 탄원하고 있다. 김 발레리씨(51)는 우즈베크의 타슈켄트 교외 집단농장인 김병화콜호스의 부회장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주 초기 새 콜호스의 기반을 닦기 위해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다. 역시 일밖에 몰랐던 아버지는 그가 스물한살 되던 해 돌아가셔서 자신이 일찍부터 집안일을 맡아야 했다. 중앙아시아로 끌려온 고려인들은 열악한 생존여건에서 선조들이 보여주었던 강인한 생명력을 다시금 발휘했다. 김병화콜호스의 경우 이주 초기 소련 집단농업 사상 유례가 없는 농업혁명을 이뤄냈다. 이주 직후 3백만평의 황무지에 사방으로 물을 대 벼와 밀, 면화와 옥수수가 출렁이는 옥토로 바꿔놓았다. 고려인들이 흘러든 폴리토트젤 프라우다 우즈베크콜호스 등 다른 집단농장에도 일제히 대변화가 일어났다. 이를 주도한 김병화콜호스는 원래 폴리아르나야 즈베즈다(북극성) 콜호스였다. 그러나 농장회장으로 농장의 번영을 가져온 ‘이중노력영웅’ 김병화가 74년 숨지자 소련당국은 그를 기리기 위해 농장의 이름을 바꿨다. 고려인 등 소수민족이 다니는 모스크바 1086학교장 엄 넬리씨(57·여)는 각종 러시아 국경일에 귀빈으로 초대되는 최고의 현장 교육행정가 가운데 한사람. 96년 러시아 최우수교장훈장을 수훈했다. 그는 우수교사에 대해 자신의 월급으로 보너스를 지급하고 있으며 사업하는 아들은 이 학교를 개보수할 때 거금 1만5천달러를 기부했다. 그같은 애착과 노력의 결과 고려인이 45%를 차지하고 있는 이 학교는 최고 수준의 대학진학성적을 내고 있다. 엄교장의 가족은 증조부 때 강원도 영월에서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37년 우즈베크 헤르기나로 이주당했으나 엔지니어여서 정착에 그렇게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조국이 해방되자 아버지는 북한으로 가 일했으나 김일성이 소련출신에 대해 무자비한 숙청을 가하자 북한을 탈출했다.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에게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국내여권에는 붉은 도장이 찍혀 중앙아시아 지역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볼쇼이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였던 남 루드밀라처럼 전문직종에서 뛰어난 재질을 보이면 이주가 허용됐다. 엄 넬리씨의 집안은 이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현재 독립국가연합의 고려인은 50만명 가량. 이 가운데 15만여명이 러시아에 살고 있다. 많은 고려인이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와해 이후 중앙아시아의 정치사회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러시아로 흘러들어왔다. 우즈베크의 경우 러시아어를 대신해 우즈베크어를 국어로 채택하고 집단농장을 우즈베크인들에게 사유화해주는등 민족주의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우즈베크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고려인들은 직장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농장생활을 하던 고려인들은 생활기반을 잃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남부러시아로 떠나 소작생활을 하거나 모스크바 근교로 옮겨가고 있다. 러시아 본토에는 사할린에서 건너온 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가까운 연해주는 물론 이르쿠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모스크바 등지로 옮겨 새 터전을 닦고 있다. 러시아의 집권 ‘우리 집 러시아’당 부총재인 유리 텐의원(한국명 정홍식·47)은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안동에서 살던 그의 조부가 사할린으로 건너왔으며 조부와 아버지는 노무자로 일했다. 정씨는 단신으로 이르쿠츠크로 건너와 고학을 하며 5년제 공업기술대를 졸업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자 도로건설회사인 트루드를 설립, 기반을 닦고 중앙정계로 진출했다. 역시 사할린에서 노보시비르스크로 옮겨와 성공한 노보시비르스크 주택건설공장 김우광사장(63)은 “고려인 동포들은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지만 러시아 시민으로 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자세와 성실함이 다민족국가인 러시아에서 성공하고 있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타슈켄트〓반병희특파원·권기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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