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부터 79년까지 3년8개월20일 동안 폴 포트는 전 국민의 25%에 해당하는 2백만여명의 양민을 학살, 캄보디아 땅을 붉은 피로 물들였다.
폴 포트가 친미 성향의 론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프놈펜에 입성했을 당시 시민들은 곧 불어닥칠 피바람을 예측하지 못한 채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며 환영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복자로서 입성했다”는 크메르 루주의 일성(一聲)과 함께 그날부터 킬링 필드의 광풍은 불어닥쳤다.
순결한 농촌공동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불순한 요소들을 모두 ‘청소’해야 한다는 폴 포트의 광적인 신념 아래에서 캄보디아는 죽음의 땅으로 변해갔다.
론놀 정권에 참여했던 군인과 공무원, 조금이라도 정권에 동조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처형됐다. 심지어는 안경을 썼거나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지식인으로 분류돼 죽음을 당했다.
방어력이 전혀 없는 어린아이 노약자 환자 등도 온갖 이유로 폴 포트의 광기앞에 죽어갔다.
폴 포트는 자신이 이상형으로 꿈꾸던 ‘농민 천국’을 이루기 위해 종교 사유재산 화폐제도를 없애고 도시 거주자를 농촌으로 보내 집단농장 생활을 강요했다.
수도 프놈펜의 시민 2백70만명중 3분의2 정도를 벽지의 강제수용소로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거부한 사람은 즉결 처형했다.
총탄을 아끼기 위해 낫 곡괭이 몽둥이를 이용해 학살하는가 하면 수십명을 묶어 불도저로 깔아죽이기도 했다.
폴 포트가 쫓겨난 뒤 들어선 캄보디아정권은 프놈펜 남쪽의 집단학살 현장에서 발굴한 1만여개의 해골로 10층짜리 위령탑을 세워 폴 포트의 만행을 고발했으며 곳곳에 유골을 모아놓은 기념관을 설립했다.
〈강수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