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측의 입장이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95년 쌀 15만t을 북에 주고서도 반대 급부는 커녕 오히려 남북관계의 악화만을 경험했던 우리로서는 그런 전철을 다시 밟을 수 없었다. 북한에 도움을 주면서도 북한에 끌려다니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를 떠나 그 자체가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 새 정부의 대북(對北)정책팀 기본 철학이었다. 정세현(丁世鉉)수석대표의 말대로 ‘남북관계의 새 틀’을 짜기 위해서도 처음부터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북한측의 입장 역시 이해못할 바는 아니었다. 전금철(全今哲)대표단장이 이례적으로 실토했듯이 북측은 비료 때문에 회담에 나왔다. 비료를 달라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이를 기회로 남측은 이산가족교류라는, 겉으론 인도적이나 사실은 북한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정치적 문제의 해결을 강요한다고 북한은 생각했다.
물론 회담은 협상이고, 협상은 서로 주고받는 것을 의미한다면 북한이 상대적으로 더 인색했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렵다. 이산가족문제 논의에 합의했으면 어떤 형태로든 남측이 신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천방안이라도 제시했어야 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보편적인 지적이다.
그러나 전망을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회담 결렬에도 불구하고 북측은 대북한 구호물자 지원을 위한 기존의 베이징 적십자접촉과 남북 경제협력은 계속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관계자들은 양측이 일단 서울과 평양으로 돌아간 후 입장을 다시 정리해 조만간 공식 비공식 접촉을 재개할 것으로 내다봤다.
남북회담은 역시 무한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우리측의 한 회담 관계자는 이번 회담 결렬로 인해 남북한 사이에 일시적으로 냉기류가 인다면 그것은 화해의 봄을 재촉하는 ‘꽃샘 추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한기흥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