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하르토대통령은 19일 대국민 성명을 통해 “나는 대통령으로 다시 선출될 준비가 돼있지 않다”며 “최대한 빨리 총선을 실시할 것”이라고 밝혀 다음 대선의 불출마 및 임기(2003년) 전 퇴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그의 이날 성명은 불확실한 표현으로 가득차 있어 국민은 헷갈리는 표정이다.
수하르토는 총선을 통해 새로운 의회를 구성,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행 헌법상 대통령과 부통령은 의회가 아니라 국민협의회(MPR)에서 뽑게 돼있다. 그렇다면 개헌을 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수하르토는 반면 “헌법이 준수되지 않으면 내전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불법 약탈행위에 대한 경고로 보이지만 개헌을 염두에 둔 상황에서 선택한 문구로는 몹시 군색한 것이다.
어떻든 그의 약속대로 최대한 빠른 시기에 총선이 실시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대선에 나서지 않겠다는 말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동안 그는 수십차례 사임의사를 밝히면서도 ‘국민의 지지를 잃는다면’이라는 전제를 붙여 ‘노회한 정객의 수사(修辭)농간’이라는 평을 들어왔다. 그가 완전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는 MPR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다시 입증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일 수하르토가 하야약속을 지킬 경우 당분간 군부출신이 정권을 장악할 것이라는 게 압도적인 전망이다. 길러진 민간지도자가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하르토가 즉시 하야를 거부한 이상 20일 ‘국민각성일’의 대규모 시위는 예정대로 벌어지고 이날 나타날 학생과 국민의 태도가 인도네시아의 장래를 결정할 나침반이 될 전망이다.
이 나라 최대의 조직인 군부는 당분간 수하르토대통령과 ‘동거’하기로 이미 의견조율을 끝낸 듯하다.
그러나 단기적인 사태진전과 관계없이 수하르토가 권좌에 존속하는 한 이 나라는 더욱 골병 들고 썩어들어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더욱이 5백여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저항권 행사’에 자신감을 갖게 된 국민의 저항이 다시 폭발할 가능성은 농후하다.
미국 등 국제사회는 일단 수하르토의 개혁안을 지지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의 연착륙(소프트 랜딩)을 절실히 바라는 입장에서 수하르토정권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재앙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은 수하르토가 약속한 절차에 따라 물러나고 온건한 대체세력이 이어받아 빨리 안정을 회복하는 ‘선순환’의 시나리오를 유도할 전망이다.
인도네시아사태는 엄밀히 말해 정치민주화에 치중했던 필리핀이나 한국의 ‘피플 파워’와는 내포하고 있는 세계사적 의미가 다르다.
특히 ‘아시아적 경제체제’에 대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조조정이 정권을 뒤흔들어 놓은 첫 임상사례에 해당되기 때문에도 그렇다.
이미 망명 여부가 관심사로 떠오른 수하르토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인도네시아사태는 국제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던지고 있다.
어쩌면 20세기의 마지막 격렬한 민주화투쟁이자 선진자본국과 후발국간의 불꽃튀는 경제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네시아사태가 어떻게 정리돼 지구촌에 파급효과를 미칠까. 전 세계인의 주시 속에 ‘마지막 승부’는 초읽기에 들어간 듯하다.
〈허승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