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는 국민이 신뢰할 만한 후계자가 없고 군부출신은 꺼림칙하며 재야에는 결집된 세력이 없어 우선 실질적인 ‘권력이양’에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보인다.
하비비 신임대통령은 수하르토의 충복으로 정치력이 전혀 검증되지 않은 인물. 이 때문에 “수하르토가 분신인 하비비를 통해 향후 정국을 수렴청정하려 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앞날을 결정할 변수로는 △수하르토와 하비비의 태도 △위란토 국방장관겸 통합군사령관 등 군부의 향배 △학생 재야 등 민주화 세력의 반응 △미국 등 국제사회의 태도 △경제상황의 호전 여부 등을 꼽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수하르토가 수렴청정에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낮게 보고 있다. 최근 역사흐름의 방향도 그렇거니와 쫓겨난 권력자가 권력을 탈환한 사례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비비가 권력을 장악해 2003년 임기까지 재임할지도 불투명하다.
그는 공학박사 출신으로 20년간 과학기술장관으로 일해온 전문 기술관료로 권력투쟁의 경험이 일천할 뿐만 아니라 군부에는 세력기반이 없다. 줄곧 군출신이 맡아오던 부통령 자리를 올 3월 그가 꿰차는 바람에 군부의 반감도 적지 않다.
인도네시아 최대의 정치 실세인 군부는 일단 하비비 지지 입장을 발표했지만 명분만 있으면 얼마든지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집단이다.
50만명의 희생자를 낸 65년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 기도를 진압한 수하르토소장이 이듬해 실권을 장악, 독립의 영웅인 초대대통령 수카르노를 유폐시키고 권력전면에 나섰을 때도 ‘수카르노의 심복’으로 불렸던 군 수뇌부는 하루 아침에 수하르토 지지로 돌아선 바가 있다.
군부내 최대 라이벌인 위란토 국방장관겸 통합군사령관과 수하르토의 사위인 프라보위 전략군사령관 사이의 갈등이 뜻밖의 군부내 무력충돌을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
혼란이 지속될 경우 한국에서 4·19혁명 후 5·16쿠데타가 있었던 것처럼 군부쿠데타가 재연될 우려도 없지 않다. 그러나 군은 이 경우에도 ‘대리인’을 내세우고 권력 전면에는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학생과 재야의 민주화세력은 수하르토 하야에 환호하지만 ‘초록은 동색’격인 하비비의 승계는 승복할 수 없다는 자세다.지금까지 하비비를 ‘수하르토의 분신’으로 간주해 ‘정 부통령 동반퇴진’을 주장해 왔던데 비하면 이들의 불만표출은 당연하다.
재야에서는 이슬람계 정치지도자인 아미엔 라이스와 수카르노 전대통령의 딸인 메가와티 등이 정국주도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에밀 살림 전환경장관과 트리 수트리스노 전부통령 등도 차기 지도자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두드러진 인물이 없어 이들이 연합해 강력한 야당세력을 형성, 집권을 준비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지만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과 주요국들은 일단 평화적인 권력이양을 높이 평가하고 새 정권에 대해 지지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사실 국제사회는 인도네시아의 조속한 안정회복에 관심이 있을 뿐 새로운 정권의 성격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안정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하비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새 카드를 내세울 수도 있다.
수하르토 퇴진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인도네시아 경제난의 호전 여부도 정국전개의 큰 변수로 꼽힌다.
국제사회는 국제통화기금(IMF) 등을 내세워 신속한 경제사회 안정을 유도할 것으로 보이나 이미 신뢰를 잃을대로 잃은 인도네시아 경제가 손쉽게 호전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번 시위과정에서 나타난 폭동과 약탈로 깊은 상처를 입은데다 외국자본과 화교자본의 이탈로 경제회복이 더 터덕거릴 가능성도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장기독재는 종식 뒤에도 독버섯처럼 길고 깊은 후유증을 남긴다.
인도네시아의 정치 평론가 목타르 부초리는 “새 정치지도자가 뚜렷이 부상하기까지는 최소한 6개월에서 3년이 걸릴 것”이라며 “당분간은 혼란을 피하기 힘들 것”으로 내다봤다.
〈허승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