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국민협의회(MPR)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된 지 70여일만에 인구 2억의 ‘인도네시아호’의 선장이 됐지만 그의 앞날은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하비비를 ‘수하르토의 분신’으로 보는 인식이 뿌리깊어 권력승계의 정통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 나라 정치권력의 핵심인 군부의 향배도 관심이다. 일단 하비비에게 충성을 다짐했지만 권력기반이 약한 기술관료출신의 그가 수하르토의 공백을 메울 카리스마와 국정장악력을 갖추고 단시간내에 군부까지 틀어쥘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하비비가 2003년 3월까지의 수하르토 잔여임기를 채우기보다는 ‘과도정부 관리자’의 역할을 맡은 뒤 정국전개에 따라 새 대통령에게 정권을 넘겨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36년 술라웨시섬의 농촌에서 태어난 그는 반둥공과대를 거쳐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60년 독일 아헨대에서 항공공학 박사학위를 땄다.
18년간 함부르크의 항공기제작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한 그는 74년 수하르토의 공업기술자문관으로 귀국, 78년부터 20년간 과학기술장관으로 재임하다 부통령이 됐다.
사무실에 인터넷사이트와 모형항공기를 둘 정도로 전공분야인 항공 등 첨단산업분야에 집착을 보이는 그의 또다른 별명은 ‘하이테크 몽상가’.
하비비가 13세때 수하르토가 하비비의 고향에 초급장교로 부임, 하비비의 집에서 자주 식사를 하고 가족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50년 가까운 것이다.
수하르토는 자서전에서 “하비비는 나를 아버지처럼 모신다. 그는 삶의 원리를 나의 조언에서 구한다”고 썼을 만큼 그를 아낀다.
〈황유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