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투자자와 컨설팅업체 등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국내 기업의 속살을 샅샅이 들여다 보고, 그 내용은 국내기업과 경쟁하는 외국계 기업들에 넘어가고 있다.
국제투자자본이 집결해 있는 뉴욕 월가(街)에서는 대형 컨설팅회사들이 “한국기업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다”며 세일즈경쟁을 벌이고 있다.
일부 외국 업체는 국내기업의 구조조정을 위한 자산매각이나 동종 해외업계와의 제휴 노력을 악용해 한국의 경쟁기업 정보를 빼내가고 있다.
이같은 기업정보 유출에 대한 대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면 기업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더라도 대외경쟁력에 치명적 손실을 입을 것으로 우려된다.
해외로 유출되는 기업정보는 선진국들의 대한(對韓) 통상압력 자료로 악용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실입증이 어려워 정보누출에 대한 형사처벌은 물론이고 손해배상 청구소송조차 낼 수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정보누출 사례〓경기 안산의 H화학은 얼마전 개발한 공업용 초정밀 합성수지의 대량 생산을 위해 미국의 동종업체인 B사로부터 2천만달러 규모의 외자를 유치하려 했다.
같은 제품을 개발중이던 미국측 파트너는 처음에는 적극적인 투자의사를 밝히며 기술사양서 및 각종 시설물 내용서와 경영회계서를 받아갔지만 막판에 투자철회를 통고해왔다.
미국회사는 H화학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반환 약정서를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련 자료를 되돌려 주지 않았다.
주방 화장실 거실 등의 먼지를 자동제거하는 이동형 소형집진기를 개발한 성남의 중소기업 다사랑도 소규모 외자를 유치하려다 제품개발서만 넘겨준 채 미국의 상대기업으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미국의 GM은 기아자동차 입찰참여 의사를 밝히며 기아에 대한 실사를 벌여 경영관련 정보들을 얻어간 뒤 입찰에는 불참, ‘정보를 빼내가기 위한 위장’이 아니었느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국내 기업정보의 유출은 외국기업이나 한국에서 활동중인 컨설팅회사들이 한국기업의 다급한 사정을 이용하는 사례가 주종을 이루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파악하고 있다. 미국계 모컨설팅사 한국지사의 제라드 김이사는 “현재 서울에서 영업중인 외국계 컨설팅사들은 한국 기업들의 웬만한 경영정보는 대부분 축적하고 있다”며 “어떠한 형태로든 이들 정보는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한편 세계은행(IBRD)의 금융감독위원회 고문단은 28,29일 5대그룹의 주채권은행들을 잇따라 방문해 이들 은행에 파견돼 있는 리먼브러더스, ING베어링스 등 외국계 컨설팅사들에 5대그룹에 관련된 자료의 제공을 요구했다.
▼문제점과 대응책〓IBRD의 월권적 행위에 대해 관련부처와 은행들은 아직도 어느 수준까지 자료를 제공해야할지, 아니면 IBRD측에 항의를 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기업들의 기업비밀에 대한 보안의식 부재와 미숙한 대처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국내 기업측의 보안의식이 제고되지 않고는 특허청이 추진중인 영업비밀의 불법유출시 1억원 이하의 벌금 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부정경쟁방지법 개정만으로는 기업정보 유출을 막을 수 없다는 지적들이다.
<반병희기자>bbhe42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