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초 중간선거에서 비록 투표율은 30%대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가 이끄는 민주당은 패배를 면했고 하원선거에서는 다섯의석을 보탰다.
그래서 그동안 북을 울리고 꽹과리를 치다시피 클린턴을 공격했던 공화당의 공세는 주춤하게 되었고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이 사실상의 선거 패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등 공화당이 오히려 진통을 겪었다.
▼ 호들갑 떨다 꼬리내려 ▼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클린턴대통령에 대한 미국 국민의 지지는 대체로 60%대를 유지했다. 그래서 그것은 미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있는 탓이라느니, 그런 불륜은 이제 미국사회에서 너무 흔하기 때문이라느니 하면서 여러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런데 왜 그런지 내 머리에는 20세기 최고의 저널리스트라고 하는 월터 리프먼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 사회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던 그는 이미 그와 그의 친구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대두하고 있다고 느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는 끝났다. 두번 다시 같은 세계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에서부터 그의 빛나는 저널리즘은 시작됐다. 그리고 그런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스테레오타입의 인간 정신을 비판했다.
인간이란 자신을 변화시키기 전에 사회환경을 변화시키고 만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저널리즘은 그러한 리프먼의 정신을 모범으로 삼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번 클린턴 스캔들을 다루는 자세에는 그런 리프먼의 정신은 없고 도리어 리프먼이 그렇게도 비판했던 스테레오타입의 ‘지적 태만’이 지배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그 스캔들이 터지자 공인(公人)에게는 프라이버시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미국 언론은 들끓었다.
수많은 신문이 사설로 앞을 다투어 그의 사임을 요구했다. 그러다가 미국 국민의 그에 대한 지지가 감소되는 기색이 없어 보이자 어느덧 그 열기가 식어간 것이다.
최근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미국 국민의 여론과는 동떨어진 미국 언론의‘클린턴사임론’에 대해 퍽 흥미있는 기사를 실었다. 미국의 언론관계자들은 ‘클린턴 사임론’이라는 논조가 국민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은데 대해서 지금은 상당히 자성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아사히는 분석했다. 떠들썩한 워싱턴과 일반 국민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고도 썼다. 국민은 미디어가 지나치게 떠들어댄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미디어와 여론 사이에는 단절이 일어나고 있다”고도 했다. 미국 국민은 미디어가 시청률을 올리거나 독자를 늘리려고 야단법석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스컴이 백악관의 사실을 폭로하는데는 성공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성이나 범죄를 기화로 폭로에 열중하는 악취미에 떨어졌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된 셈이다.
정말 매스컴이 독자나 청취자를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시대가 미국에서는 끝났다는 교훈을 그들은 되씹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번에 클린턴 스캔들 보도에 실패한 것은 바로 리프먼이 저널리스트로 출발한 원점,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 또는 시대는 끝났고 그것이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무시했던 탓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날마다 변화를 쫓는다는 언론도 지난날의 스테레오타입, 이미 허구가 된 것에 매달려 있었다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 달라진 사회 읽었어야 ▼
그러한 자세에 대한 그들의 대선배요, 스승이었던 리프먼의 영원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클린턴 스캔들에 대한 그런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미국 미디어가 미국 국민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것은 근본에 있어서 미국 사회가 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도 스테레오타입의 고정관념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하겠다.
또 한명의 미국의 위대한 저널리스트인 제임스 레스턴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저널리스트에 대한 리프먼의 정의(定義), ‘취재를 하고… 모래 위에다 바다가 휩쓸어갈 스케치를 하며 망설이는 인간’이라고 한 겸허한 말을 되새겨보고 싶다.
지명관<한림대교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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