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동창회「붐」…구조조정 한파『모든것 잊고 옛날로』

  • 입력 1998년 12월 25일 20시 00분


일본 일류회사의 중견사원 하시모토 요이치(橋本洋一·38)는 며칠전 도쿄(東京)시내 롯폰기(六本木)에서 열렸던 고교동창회를 생각하기만 하면 미소가 떠오른다.고교를 졸업하고 20년만에 만난 친구도 있었지만 모두 세월의 흐름을 잊고 옛날로 돌아가 오랜만에 회사나 가정에서 느끼지 못했던 푸근함을 맘껏 느껴봤기 때문이다.

하시모토는 “각자 하고 있는 일은 아예 화제가 안됐다”며 “학교 옆에 있던 우동집과 성격이 괴팍했던 선생님, 여학생을 따라다닌 추억과 술을 마시다 걸린 이야기 등으로 낄낄거리며 몇시간을 보냈는데도 전혀 지루함을 몰랐다”고 즐거웠던 동창회 기억을 털어놓았다.

그는 “처음에는 모두 어깨가 축 처져 있었지만 과거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술잔을 들다보니 금세 분위기가 살아났다”며 “헤어질 때는 교가도 부르고 구호도 외치며 ‘앞으로는 자주 만나자’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올들어 일본에는 30,40대의 초중고교 동창회 붐이 일고 있다. 동창회 열기의 사회상을 다룬 언론보도도 여느 해보다 잦다.

특히 망년회 시즌인 요즘 도쿄의 롯폰기 오모테산도(表參道) 긴자(銀座)의 레스토랑이나 와인바에서는 중년 남성들의 동창회가 빈번하다.

동창회 열기는 소설과 광고에까지 확산돼 인기 탤런트 야마다 구니코(山田邦子)가 쓴 감미로우면서도 쌉쌀한 소설 ‘동창회’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유명 화장품회사인 시세이도(資生堂)가 올 가을부터 여배우인 고이즈미 교코(小泉今日子)를 화장품 모델로 기용한 광고의 배경도 고이즈미가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는 장면으로 크게 히트했다.

일본의 동창회 열기 원인은 무엇일까.

교토(京都)대 다케우치 요(竹內洋)교수는 “동창회 붐은 역사붐과 마찬가지로 ‘회상(回想)공동체’에 대한 향수를 반영한다”며 “특히 일본사회가 갈수록 원자화되고 경제마저 엉망이 되면서 동창회가 상징하는 ‘푸근함’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고 분석했다.

전후 최악의 불황과 기업 구조조정으로 언제 떨려날지 모르는 회사원, 각종 스캔들로 사회적 체면이 바닥에 떨어진 관료나 정치인, 금융불안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금융인. 이들 누구라도 ‘감시와 제약’이 없는 동창회에 나가 목을 죄는 듯한 현실로부터 잠시라도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내일이 보이지 않는 ‘혼미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동창회는 잠시 스스로를 돌아보고 한순간이나마 갈증을 채울 수 있는 청량제인지도 모른다.

〈도쿄〓권순활특파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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