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버린 컴퓨터 안심말고 외국인기술고문 믿지말자.’
국가정보원이 22일 발표한 산업기밀 유출실태는 한국도 어느샌가 ‘국제산업정보전쟁’의 치열한 현장이 됐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지능적이고 조직적인 고도의 산업첩보전이 바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정원은 국내 진출 대형다국적기업들이 마케팅전략과 생산기술노하우 등을 수집하기 위해 경영컨설팅 인력스카우트 연구사업공동참여 해커활동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각종 국내산업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며 ‘산업정보 유출경보’를 발령했다.
국정원에 따르면 국내진출 다국적기업으로부터 기업정보 수집을 의뢰받은 미국의 사설정보업체인 C사는 국내 이동전화대리점 직원을 매수해 ‘표적’의 통화내용을 입수하거나 ‘표적’이 자주찾는 룸살롱 종업원을 매수한 뒤 감청장비를 이용해 술자리 대화를 엿듣기까지 했다는 것.
C사는 또 첨단장비를 국내로 들여와 ‘표적’이 지워버린 컴퓨터를 복원하거나 ‘표적’의 약점을 잡기 위해 비리정보까지 수집해 왔다.
‘빅딜’이나 기업인수합병 등 국내 주요기업들의 구조조정에 따른 불안심리에 편승해 반도체 등 첨단산업분야 기술인력을 통째로 빼내가는 사례도 있었다.
미국의 M사는 세계 최고수준인 부호분할다중접속(CDMA)상용화 기술정보를 빼내기 위해 국내 H사와 S사의 핵심연구원 수십명을 작년 4월 스카우트했다. 또 미국의 C사는 작년 10월 액정화면(LCD)분야의 국내 핵심기술자 유모씨 등을 스카우트한 뒤 해외합작투자 형태로 기술회사를 설립해 기술정보 유출을 기도했다.
보다 교묘한 사례도 있었다. 작년 1월 국내 굴지의 반도체업체인 S사에 근무했던 김모씨 등 31명은 벤처기업을 위장해 반도체기술판매회사인 KSTC사를 설립하고 대만의 경쟁업체와 계약을 체결한 뒤 학연 지연을 동원해 반도체기술정보를 빼내 대만에 팔아넘겼다.
국내 산업체의 보안관리가 허술한 점을 틈타 유치과학자나 외국인기술고문 등이 핵심자료나 연구성과물의 밀반출을 기도하거나 컴퓨터프로그램을 절취하는 등 고전적인 ‘정보절도’ 사례도 많았다.
작년 4월 국내 H전자의 일본인기술고문은 계약만료시 CDMA 부품회로도와 핵심부품 등을 가방 속에 숨겨 밀반출하려다 적발됐다. 작년 12월엔 한 빅딜 관련업체에서 반도체공정 핵심프로그램이 입력된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도난당하기도 했다.
국정원은 국내진출 다국적기업들이 첨단기술정보뿐만 아니라 환경 건설분야 등 대형 국책사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정보 수집활동도 한층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임채청기자〉ccl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