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런 한심한 사태가 벌어졌는지 한일어업협정의 전말을 추적한다.
▽준비소홀〓65년 체결된 구 한일어업협정은 70년대초부터 개정 필요성이 제기돼왔다. 당시 일부 국가가 2백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선포하자 전문가들은 “한일어업협정도 EEZ 도입 추세에 맞춰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EZ를 인정한 유엔 해양법협약이 94년 발효되자 한국과 일본은 96년 각각 이 협약을 비준했다. 우리 정부는 96년 들어서야 협상관련 통계를 챙기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태에 대한 체계적인 준비작업은 전무했다. 지난해 1월 일본이 먼저 기존 협정의 파기를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협상전략을 세우느라 부산을 떨었다.
구체적인 조업조건 협상은 양국 관계부처가 두루 참여하는 한일어업공동위원회가 맡기로 돼 있었으나 시간이 촉박해 양국 수산당국자간 실무협의로 대체됐다. 그 결과 전문지식은 물론 조업 현장에 대한 기초자료도 갖추지 못한 해양수산부가 협상을 떠맡게 됐다.
▽그물도 못건졌다〓국익이 걸린 협상인데도 정부는 상대방의 ‘선의’만 기대하고 지나치게 안이하게 대응했다. 협상결렬에 대한 준비는 전혀 없었다.
1월 22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어업실무협상이 결렬됐지만 외교통상부 장관은 서울에서 주한 일본대사와 한일어업협정 비준서를 교환했다. 조업조건 합의가 안되는 바람에 일본 수역에서 고기를 잡던 어민들은 졸지에 ‘불법어로 현행범’ 신세가 됐다. 일본은 즉각 우리 어선 3백36척에 대해 자국 수역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71척은 그물 통발 등 값비싼 어구를 내팽개친 채 가까스로 배만 빠져나왔고 미처 철수하지 못한 5척은 나포됐다. 한국 수역에서 붙잡힌 일본 어선은 한척도 없었다.
▽쌍끌이어선의 누락〓한일어업협정의 실책은 쌍끌이어선 누락이 극명하게 보여준다.
협정에 쌍끌이 어선이 빠진 것은 해양수산부 협상실무팀이 일본 EEZ내에서 조업할 우리 어선의 업종을 결정하기에 앞서 현장조사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해양부는 96년부터 어민대표들을 상대로 일본 수역에서 조업하는 우리어선의 종류와 수, 어획량 등을 조사했다. 통발 저자망 저인망 등 14개 업종별로 연간 어획실적이 취합됐지만 이 과정에서 쌍끌이어선의 존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어민 생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 몇몇 공무원의 자의적인 판단과 부실한 관변자료에 근거해 이뤄진 것이다.
▽까다로운 조업 절차〓2월5일 실무협상이 타결됐지만 어민들은 일본 수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일본측이 부처간 협의에 시간이 필요하다며 차일피일 조업 허용을 미뤘기 때문. 협상 타결후 3,4일안에 조업 재개가 가능하다는 당초 발표와는 달리 실제 조업은 2월22일에야 이뤄졌다.
전국어민총연합회 유종구(兪鍾久·50)회장은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물때(성어기)’를 놓치기 십상”이라며 “입어 절차가 너무 번거로워 출어를 포기하는 어선들이 많다”고 전했다.
▽명분에 급급, 실익은 뒷전〓대게잡이 저자망 및 장어잡이 통발어선의 일본 수역 조업에 관한 협상에선 명분에 집착해 실리를 놓치고 말았다. 한국은 이미 장어와 대게 쿼터를 확보한 상태였지만 일본은 저자망과 통발이 자국법상 금지돼있는 점을 들어 불허 입장을 고수했다.
합의된 절충안은 ‘한국 어선들의 장어 및 대게잡이를 허용하되 저자망을 저인망으로 바꾸고 통발 수를 줄인다’는 것. 외견상 우리측 요구가 관철된 것처럼 보였지만 어민들은 “어구를 바꾸는 데 목돈을 쓰느니 차라리 조업을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반응을 보였다.
▽도발적 나포에도 속수무책〓협상타결후 조업재개 전인 설 연휴 중 일본측이 동중국해 해상에서 우리 어선 2척을 나포한 행위는 국제관례를 무시한 ‘납치’ 행위였다.
우리 어선들은 중국과 일본의 EEZ가 겹치는 중일 잠정조치수역 중 중국과 가까운 곳에서 조업하다 붙잡혔다.
나포된 어선들은 정부의 지침을 충실히 이행하다 봉변을 당한 것이다. 일본측이 조업재개를 며칠 앞두고 우리 어선을 나포한 것은 다분히 감정적인 조치였지만 한국 정부는 변변한 논리전개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일본 EEZ와 가까운 곳에서 조업하면 붙잡힐 수 있으니 아예 멀찍이 떨어져서 고기를 잡으라.” 우리 정부는 어민들에게 이렇게 주문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부산의 한 어민은 “도대체 우리 정부는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정말 정부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박원재기자·부산〓조용휘기자〉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