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살아보니]나이토 다마미/한국식 우정

  • 입력 1999년 3월 28일 19시 43분


한국에서 산 지 어느새 5년이 됐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한국말을 배우러 왔다가 이렇게 긴 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다. 단순히 귀국할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라 솔직히 말해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에는 마음이 끌리는 뭔가가 있다.

94년 한국에 처음 와서 1년9개월 동안 어학과정을 마치고 한 대학에 들어갔다. 내 어학실력으로는 도저히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다. 심한 좌절감 속에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학교 캠퍼스를 멍하게 걸어갈 때 남학생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나이토상이시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가 도와드릴테니까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그러면서 전화번호와 삐삐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주었다. 뜻밖이었다. 그 후에도 도와주겠다고 말을 걸어준 학생들은 한 두명이 아니었다.

힘겨워하는 마음과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항상 남에게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준다는 사실에 너무 고마웠다. 이런 미풍양속이 한국의 특징이다. 한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 결코 느낄 수 없는 마음의 따뜻함을 갖고 있다. 그 학생들에게 연락을 하지는 않았지만 힘들었던 시절에 언제든지 날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른다. 그들의 다정한 말이 오늘 내가 한국에 있을 수 있는 힘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친구도 늘어났고 인맥도 넓어졌지만 친구가 많아졌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었다. “일본 말을 가르쳐 달라” “자료 좀 번역해 달라” 크고 작은 부탁이 쏟아졌다. 일본인의 상식으로는 친구든 아니든 누구라도 일을 시키면 그만큼 보수를 줘야 한다. 한국은 달랐다. 이 점은 아직까지도 이해하기 힘들다.

처음 친구들이 일거리를 주었을 때는 ‘내 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구나’라고 지레짐작했다. 기분이 좋았다. 전자제품 설명서나 책 한 권을 번역하는 일까지 날짜를 꼭 지키고 열심히 번역했다. 그러나 막상 끝나고 보면 아무리 기다려도 나올 것이 안 나온다. 돈달라고 말하면 너무 속좁게 보일 것 같아 차마 못했다. 왠지 이용당하고 사기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올 것은 안 나와도 한국인들이 그럴 때마다 꼭 대사처럼 하는 말이 있다. “고마워요. 나중에 대접할게요” “맛있는 것 사줄게요” 여태까지 그 말을 몇 번씩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밥이라니? 아무리 어려워도 아직 굶어죽을 지경은 아닌데 일한 대가로 밥을 사준다고? 그런 법이 어디 있나?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괴로웠다.

오히려 아는 사람들이 사기꾼처럼 보여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일들이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일본인은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일을 맡은 측도 암묵적인 양해하에 당연히 대가가 따를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은 그게 아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아무 대가 없이 서로서로 도와주는 것이지 친구 사이에는 돈 따위를 결코 매개체로 삼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요즘은 친구가 부탁하면 아예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해준다. 대신 친구들도 내가 어려울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겠지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나이코 다마미<시즈오카 아사히TV 통역원>

△68년 일본 시즈오카출생 △시즈오카여대 졸업 △94년1월∼95년 9월 연세대어학당 졸업 △현재 시즈오카 아사히TV 통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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