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러시아가 흑해함대를 지중해에 보내기로 한 것은 국내외를 겨냥한 다목적 포석으로 보인다.
우선 경제난은 겪고 있지만 군사력에서는 아직도 막강하다는 점을 서방과 옛 공산권국가들에 과시하려 한 것 같다. 흑해함대는 냉전시대에 지중해를 놓고 미6함대와 겨뤘던 존재다. 군사대국 이미지를 부각시켜 국가위신도 살리고 러시아연방내 체첸공화국 등의 분리 움직임에도 경고를 보내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서방의 경제지원 확대를 노렸는지도 모른다. 확전을 바라지 않는 미국으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러시아측에 ‘당근’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옐친으로서는 “같은 슬라브족(유고)이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다”는 국내불만을 무마할 필요도 있었다. 옐친은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공산주의자 극우민족주의자들의 부추김, 그리고 이에 따른 국민과 군부의 동요를 진정시켜야할 처지다. 러시아 하원의 전력강화 결의안 채택이나 아나톨리 크바니신 군참모총장의 ‘핵무기 사용’ 발언은 국민과 군부의 꿀렁거리는 분위기를 시사한다.
그러나 이번에 러시아가 실제로 무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그렇게 되면 서방의 경제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옐친도 “군사개입은 않겠다”고 거듭 말했다. 러시아는 91년 걸프전 때도 이라크를 지원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으나 시위로 끝났다.
〈윤양섭기자〉lailai@donga.com
◆ 미국
미국은 러시아 흑해함대의 지중해 파견을 일종의 ‘무력시위’로 보고 있는 듯하다.
제임스 루빈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이번 결정이 결코 사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러시아의 대규모 함대파견이 유고와 다른 국가들에 보낼 신호를 우려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신호’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 지상군 투입 같은 고강도 군사개입으로 나가면 러시아도 유고편에서 무력개입할 수도 있다는 암시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이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정황증거는 아직 없다. 러시아측은 ‘핵무기 사용’까지 거론했지만 미국은 이를 심각하게 보면 볼수록 러시아의 입지만 강화시켜주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번 일로 안보관련 장관회의가 긴급 소집된다거나 빌 클린턴 대통령의 행사일정이 바뀌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미국 언론들도 모스크바발 기사로 이 문제를 다뤘을 뿐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보스턴 글로브는 1일 흑해함대가 기름이 떨어져 많은 함정을 지중해까지 보낼 수 없음을 흑해함대 대변인이 인정했다고 꼬집었을 정도다.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한 러시아언론의 여론조사결과를 인용하면서 응답자의 57%가 외교를 통한 공습 저지를 지지했고 무력개입에는 2.8%만 찬성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러시아의 무력개입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있음을 말해주는 사례들이다.
〈워싱턴〓홍은택특파원〉eunta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