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국경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량 학살과 조직적 강간을 손놓고 바라보고만 있다면 어떻게 정의를 세울 수 있는가. 코소보사태가 국제사회에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데이비스 캠퍼스의 마이클 글레논 법학교수는 곧 발매될 포린어페어스 5,6월호에 기고한 논문을 통해 ‘신개입주의(New Interventionism)’라는 개념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모색했다. 이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유엔헌장은 1939년 독일의 나치정권이 폴란드를 병탄하면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바탕으로 제정됐다. 다른 주권국가에 대한 침략을 방지하면 국제안보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냉전이후 국가간의 전쟁은 국제안보에 대한 위협이 더 이상 아니다. 인종과 종교, 문화적 차이를 이유로 발생하는 국가내 폭력이 더 심각한 위협이다.
이에 대해 유엔헌장은 무력하다. 아이티와 르완다 사태 등이 그랬다. 사실 유엔헌장은 주권국가에 대한 침략에도 무력했다. 헝가리 체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침략에도, 그레나다 파나마 니카라과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에도, 인도네시아의 동 티모르 탄압과 중국의 티베트 탄압에도 어떤 제재도 가하지 못했다.
자국민이라는 이유로 국제사회의 간섭을 거부하며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유엔헌장에 묶여 개입하지 않는 것을 국제적 정의라고 할 수는 없다. ‘신개입주의’가 불가피하다.
신개입주의는 개입하지 않았을 때 치러야할 인류의 희생보다 개입의 이익이 클 경우에는 개입을 주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미국과 NATO의 유고공습은 유엔헌장에 대한 도전이며 이같은 개입주의에 관한 논의의 시작이다.
물론 자의적인 군사개입은 강자의 권력남용이라는 또 다른 재앙을 초래한다. 이데올로기의 차이 때문에, 또는 자국의 국가적 이익을 노리고 군사개입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반드시 국제적 협정이 뒷받침돼야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협정이 도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코소보사태에서 미국과 NATO는 손놓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적극적 개입을 선택했다. 종종 정의를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힘이 사용되고 새로운 법이 그 뒤를 따라오기 마련이다.
〈워싱턴〓홍은택특파원〉euntack@donga.com